[include(틀:다른 뜻1, other1=벨기에의 국왕, rd1=레오폴드 2세)] [include(틀:역대 신성 로마 황제)] ---- ||<#E8E096><:> '''{{{#1e1e1d,#2d2f34 레오폴트 2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헝가리 국왕)] ---- [include(틀:역대 보헤미아 국왕)] ---- [include(틀:역대 토스카나 대공)] ---- [include(틀:역대 밀라노 공작)] ---- [include(틀:역대 부르고뉴 공작)] ---- [include(틀:역대 룩셈부르크 공작)] }}} || ---- ||<-2>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3대 황제''' [br]{{{+1 '''레오폴트 2세'''}}}[br]'''Leopold II''' || ||<-2>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1280px-Emperor_Leopold_II.jpg|width=100%]]}}} || || '''이름''' ||페터 레오폴트 요제프 안톤 요아힘 피우스 고트하르트[br](Peter Leopold Joseph Anton Joachim Pius Gotthard)|| || '''출생''' ||[[1747년]] [[5월 5일]][br][[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오스트리아)|빈]]|| || '''사망''' ||[[1792년]] [[3월 1일]] (44세)[br][[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오스트리아)|빈]]|| ||<|6> '''재위''' ||[[신성 로마 황제]], [[로마왕]]|| ||[[1790년]] [[9월 30일]] [[~]] [[1792년]] [[3월 1일]]||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크로아티아]]의 국왕|| ||[[1790년]] [[2월 20일]] ~ [[1792년]] [[3월 1일]]|| ||[[토스카나 대공국|토스카나 대공]]|| ||[[1765년]] [[8월 18일]] ~ [[1790년]] [[7월 22일]]|| || '''배우자'''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차녀로, 셋째 남동생 [[페르디난도 1세|페르디난도]]는 남편의 여동생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결혼하였으니 겹사돈이다.] ,,(1764년 결혼),,|| || '''자녀'''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2세]], [[페르디난도 3세]], [[카를 루트비히|카를]], 알렉산더 레오폴드, 요제프, 마리아 클레멘티나, 안톤 빅토어[* 마지막 [[쾰른 선제후국|쾰른 선제후]].], 요한, 라이너 요제프, 루트비히, 루돌프[* 일명 루돌프 대공.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제자로 유명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7번은 이 자에게 헌정었는데 때문에 [[대공(작위)#s-3.1.1|대공(Erzherzog)]]이라는 가명으로 더욱 유명하다. [[1788년]] ~ [[1831년]].]|| || '''아버지''' ||[[프란츠 1세|프란츠 1세]]|| ||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마리아 테레지아]]|| ||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오스트리아)|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오스트리아)|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 앙투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 '''종교''' ||[[가톨릭]] || || '''서명''' ||[[파일:레오폴트 2세 서명.svg|width=100&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크로아티아]]의 왕, [[토스카나 대공국|토스카나 대공]]이다.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는 레오폴트 7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2세는 [[알브레히트 1세]]의 손자이다.] 보헤미아 왕으로서는 레오폴트 2세, 헝가리 왕으로서는 리포트 2세, 크로아티아 왕으로서는 레오폴드 2세, 토스카나 대공으로서는 피에트로 레오폴도 1세이다. 본명은 페터 레오폴트 요제프. 첫 번째 [[세례명]]은 대부인 [[러시아 제국]] 황제 [[표트르 3세]]가 지어주었으나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선호되지 않는 이름이어서 항상 '레오폴트'라 불렸다. == 생애 ==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3남으로 태어났지만 차남이 일찍 죽은 덕에 사실상의 차남으로 대우받았다. 1764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했고,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 차남 레오폴트 2세 결혼식 축하하러 갔다가 [[인스브루크]] 궁전에서 뇌졸중으로 사망]가 죽고 형 [[요제프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자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대리인만 보내고 한동안 방치된 토스카나 대공국을 발전시켰다. 하수도 정비 등의 공공사업을 수행했고 세제를 개선했으며 군대 양성 및 산업 부흥,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하였다. [[1784년]]에는 [[피렌체]]에 [[우피치 미술관]]에 견줄만한 새 [[아카데미아 미술관(피렌체)|미술관]]을 지었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이 곳에 위치해 있다. 레오폴트는 [[메디치 가문]]이 남긴 구습을 철저하게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외적인 발전과는 별개로 주민들로부터는 외지인이라며 인기가 없었고 교회 개혁 과정에서 [[교황]] 세력과 충돌하기도 했다. 교회의 재산을 세속으로 가져오는 데 실패했으며 성직자들에 대한 법령 통제 역시 실패. [[가톨릭]] 세력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1786년 11월 사형제도를 폐지하기도 했다. 레오폴트 2세는 토스카나를 통치하기 위해서 비밀경찰을 창설해 활용했다. 형 [[요제프 2세]]가 아들을 낳지 못 했기에 그는 사실상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요제프 2세가 레오폴트에게 섭정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거절했다. 1790년, [[요제프 2세|형]]이 사망하자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로 선출되었으며 토스카나 대공국은 차남에게 물려주고 [[빈(오스트리아)|빈]]으로 떠났다. 그는 우선적으로 요제프 2세의 실정들을 만회했다. 형이 벌여놓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1790년 9월에 8개월 기간의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1791년에 시스토바 조약을 체결, 종식시켰고 [[프랑스 혁명]]을 이유로 [[프랑스 제1공화국|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했으며 [[벨기에인|남네덜란드인]]의 특권을 인정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네덜란드 지역]]을 진정시키고 각 지역의 의회 세력 또한 파트너로서 인정했다. 대내적으로는 온건책을 쓰며 혁명의 기운을 억제하는 데 주력했고, [[동맹의 역전]] 이래 적대관계였던 [[영국]]과 다시 동맹관계를 맺고 프랑스의 상황 변화에 주목했다. 중간에 [[러시아 제국]] 황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침공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레오폴트 2세는 거부했다. 제3차 [[폴란드 분할]]로 남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를 합병하고 오스만 제국과 싸우려는 예카테리나 2세의 생각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박하고 성실한 성품을 가졌고 대체로 형인 요제프 2세보다 나은 인재였다고 평가된다. 재위 2년 만에 갑자기 타계하였다. 독살설이나 암살설이 돌았지만 입증된 건 없다. 재위는 장남 [[프란츠 2세]]가 이었다. == 가족 ==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레오폴트 2세[br]{{{-2 (Leopold II)}}} ||<|6> [[프란츠 1세]][br]{{{-2 (Francis I)}}} ||<|3> [[로렌 공국|로렌]] 공작 레오폴드[br]{{{-2 (Leopold, Duke of Lorraine)}}} || || [[로렌 공국|로렌]] 공작 샤를 5세[br]{{{-2 (Charles V, Duke of Lorraine)}}} || ||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br]{{{-2 (Eleonore of Austria)}}} || ||<|3>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br]{{{-2 (Élisabeth Charlotte of Orléans)}}} || ||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br]{{{-2 (Philippe I, Duke of Orléans)}}} || || [[엘리자베트 샤를로테|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br]{{{-2 (Elis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 ||<|7> [[마리아 테레지아]][br]{{{-2 (Maria Theresa)}}} || ||<|3> [[카를 6세]][br]{{{-2 (Charles VI)}}} || || [[레오폴트 1세]][br]{{{-2 (Leopold I)}}} || || [[엘레오노레 막달레네|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br]{{{-2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 ||<|3>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br]{{{-2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br]{{{-2 (Ludwig Rudolf,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 ||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br]{{{-2 (Christine Louise of Oettingen-Oettingen)}}}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녀''' || 작센의 왕비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가 본인의 자녀들에게 장녀를 낳으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으라고 명한 것에 따라, 레오폴트 2세의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도 친조모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친사촌이나 고종사촌 중에서도 장녀인 경우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딴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고종사촌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고모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로 독일식으로는 마리아 테레지아 카롤리나), 마리아 테레사(큰아버지 [[요제프 2세]]의 장녀) 등이 있다.][br]{{{-2 (Maria Theresia, Queen of Saxony)}}} || [[1767년]] [[1월 14일]] || [[1827년]] [[11월 7일]] || [[안톤(작센)|작센 국왕 안톤]][br]슬하 1남 3녀 || ||<|4> '''1남''' ||<|4> [[프란츠 2세]][br]{{{-2 (Franz II)}}} ||<|4> [[1768년]] [[2월 12일]] ||<|4> [[1835년]] [[3월 2일]] || [[엘리자베트 빌헬미네 루이제|뷔르템베르크의 엘리자베트]][br]슬하 1녀 || ||<#F0F8FF,#001b33>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br]슬하 4남 8녀[* [[마리 루이즈|프랑스의 황후 마리 루이즈]], [[페르디난트 1세(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레오폴디네|브라질의 황후이자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레오폴디네]], [[프란츠 카를|프란츠 카를 대공]] 등] || ||<#F0F8FF,#001b33> 외스터라이히에스테의 마리아 루도비카 || ||<#F0F8FF,#001b33> [[카롤리네 아우구스테|바이에른의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 ||<|2> '''2남''' ||<|2> [[페르디난도 3세|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br]{{{-2 (Ferdinando III, Grand Duke of Tuscany)}}} ||<|2> [[1769년]] [[5월 6일]] ||<|2> [[1824년]] [[6월 18일]]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루이사 마리아[* 위에 나온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의 동생으로 [[겹사돈]]이다.][br]슬하 1남 2녀[* [[레오폴도 2세|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 등] || || 작센의 마리아 페르디난다 || || '''2녀'''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여대공[br]{{{-2 (Archduchess Maria Anna of Austria)}}} || [[1770년]] [[4월 21일]] || [[1809년]] [[10월 1일]] || || || '''3남''' || [[카를 루트비히|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 대공]][br]{{{-2 (Archduke Karl Ludwig, Duke of Teschen)}}} || [[1771년]] [[9월 5일]] || [[1847년]] [[4월 30일]] ||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헨리에타[br]슬하 4남 2녀 || || '''4남''' || 오스트리아의 알렉산더 레오폴트 대공[br]{{{-2 (Archduke Alexander Leopold of Austria)}}} || [[1772년]] [[8월 14일]] || [[1795년]] [[7월 12일]] || || || '''5남''' ||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요한 요제프 대공[br]{{{-2 (Archduke Albrecht Johann Joseph of Austria)}}} || [[1773년]] [[9월 19일]] || [[1774년]] [[7월 22일]] || || || '''6남''' ||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요한 요제프 대공[br]{{{-2 (Archduke Maximilian Johann Joseph of Austria)}}} || [[1774년]] [[12월 23일]] || [[1778년]] [[3월 10일]] || || ||<|3> '''7남''' ||<|3>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안톤 대공[* 스페인 국왕 [[알폰소 12세]]의 두번째 왕비이자 [[알폰소 13세]]의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외조부[* 4녀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가 두번째 남편 카를 페르디난트 대공([[카를 루트비히|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차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가 마리아 크리스티나.]이기도 하다.][br]{{{-2 (Archduke Joseph Anton of Austria)}}} ||<|3> [[1776년]] [[3월 9일]] ||<|3> [[1847년]] [[1월 13일]] ||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br]슬하 1녀 || || 안할트 베른부르크-샤움부르크-호임의 헤르미네[br]슬하 1남 1녀 || ||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도로테아[br]슬하 2남 3녀[* [[마리 헨리에테 안네|벨기에의 왕비 마리 앙리에트]] 등] || || '''3녀''' || 칼라브리아 공작부인 마리아 클레멘티나[br]{{{-2 (Maria Clementina, Duchess of Calabria)}}} || [[1777년]] [[4월 24일]] || [[1801년]] [[11월 15일]] || [[프란체스코 1세|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br]슬하 1남 1녀 || || '''8남'''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부왕, 안톤 빅토어 대공[* 1801~1803년 쾰른 선제후였다. [[쾰른 선제후국]]이 [[프랑스 제1공화국]]에 합병된 후 [[튜튼 기사단]]장을 맡다가 [[빈 회의]]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 신설되며 [[부왕]]이 되었다.][br]{{{-2 (Archduke Anton Viktor, Viceroy of Lombardy–Venetia)}}} || [[1779년]] [[8월 31일]] || [[1835년]] [[4월 2일]] || || || '''4녀'''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br]{{{-2 (Archduchess Maria Amalia of Austria)}}} || [[1780년]] [[10월 17일]] || [[1798년]] [[12월 25일]] || || || '''9남''' || 오스트리아의 요한 대공[*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외증조할아버지다. 안나 플로흘(Anna Plochl, 1804~1885)이라는 우체국장의 딸과 [[귀천상혼]]해서 둘 사이의 외아들 메란 백작 요한 슈테판은 백작 지위를 받았고 요한 슈테판의 외손자가 바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요한과 안나의 이야기는 2009년 오스트리아에서 나온 '사랑하는 요한, 사랑하는 안나'(Geliebter Johann Geliebte Anna)라는 90분짜리 단편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br]{{{-2 (Archduke Johann of Austria)}}} || [[1782년]] [[1월 20일]] || [[1859년]] [[5월 11일]] || 안나 플로흘[*귀천상혼 ][br]슬하 1남 || || '''10남'''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부왕, 라이너 요제프 대공[* 1818년부터 1848년까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부왕으로 재임했다.][br]{{{-2 (Archduke Rainer Joseph, Viceroy of Lombardy–Venetia)}}} || [[1783년]] [[9월 30일]] || [[1853년]] [[1월 16일]] || 사보이아의 엘리사베타[* [[카를로 알베르토|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여동생.][br]슬하 5남 1녀[* [[오스트리아의 아델하이트|사르데냐의 왕비 아델라이데]] 등] || || '''11남''' ||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대공[br]{{{-2 (Archduke Ludwig of Austria)}}} || [[1784년]] [[12월 13일]] || [[1864년]] [[12월 21일]] || || || '''12남''' || 올로모우츠 대주교 겸 추기경 루돌프 대공[*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제자로 유명하다.][br]{{{-2 (Archduke Rudolph, Cardinal and Archbishop of Olomouc)}}} || [[1788년]] [[1월 8일]] || [[1831년]] [[7월 24일]] || || 딸 2명을 둔(그마저도 둘 다 요절) 형 [[요제프 2세]]와 달리 자녀를 12남 4녀나 두었다.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자녀 수가 같다. 그 덕분에 어머니 때부터 끊긴 합스부르크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녀가 '''12남 4녀'''인데 요절한 5남, 6남을 제외해도 총 10명의 아들이 성인으로 자랐다. 현존하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남계후손은 모두 레오폴트 2세의 후손들이다.[* 과거에는 동생 페르디난트 대에서 갈라진 [[모데나 레조 공국]]의 에스테 분가도 있었지만 1875년에 대가 끊겼다.] 그러나 이들 중에 후사를 남긴 자녀는 얼마 안 된다.[* 차녀 마리아 안나, 4남 알렉산더, 5남 알브레히트, 6남 막시밀리안, 8남 안톤, 4녀 마리아 아말리아, 11남 루트비히, 12남 루돌프는 미혼으로 사망했고, 장녀 마리아 테레사는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가 없었고, 9남 요한은 [[귀천상혼]]을 했다. 참고로 차녀 마리아 안나는 수녀가 되었고, 8남 안톤과 12남 루돌프 역시 성직자가 되었다. [[귀천상혼]]하지 않은 자녀 중 후사를 남긴 사람은 장남 프란츠 2세, 차남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 3남 카를, 7남 요제프, 3녀 마리아 클레멘티나, 10남 라이너로 총 6명이다. 귀천상혼한 9남 요한까지 포함하면 7명. 현재 직계 남계후손이 전해지는 아들은 장남 프란츠 2세, 차남 페르디난도 3세, 7남 요제프 3명이고, 3남 카를, 10남 라이너는 여계후손이나 귀천상혼한 후손만 남아 있다.] == 여담 == 레오폴트는 막내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만난 적도 많지 않았고 앙투아네트를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도움을 청했으나 레오폴트는 국왕 부처가 파리를 빠져나오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당시 그는 영국과 프로이센 등의 대 프랑스 동맹국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바렌느 배신사건|바렌느 도주 사건]]으로 인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체포되고 처형당할 조짐까지 보이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참고로 저 바렌 사건 준비 당시엔 매제였던 [[루이 16세]]가 탈출자금을 빌려달라고 해도 거절할 정도로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일국의 왕이 자기 식솔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튈 결심을 할 정도로 프랑스 내의 전제군주정의 상태가 위태롭다는 것을 잘 실감하지 못했던 모양. 당시 프랑스는 [[루이 13세]]부터 [[루이 14세]] 시기를 거치면서 강력한 왕권이 정립된지 거의 100년이 되었고, 전 유럽에서 가장 강한 왕권을 휘둘렀기에 진심으로 매부의 왕권이 저렇게 약해졌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선왕인 [[루이 15세]]의 삽질 덕에 프랑스의 왕권은 조금씩 추락하고 있었고, 루이 16세는 개인적으로는 선량할지언정 외모와 성격부터가 권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국왕이었다. 이러한 악조건이 겹치면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일가의 상황은 레오폴트 2세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여동생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상을 벌일려고 했다. 하지만 중도에 급사하는 바람에 협상 타결과 전쟁은 장남 [[프란츠 2세]]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프란츠는 고모를 구하는데 그닥 열정적이지 않아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레오폴드 2세|콩고에 강림한 어느 악마 대마왕]]과는 이름이 같지만 나라도 시대도 다른 인물이다. 다만 아예 관계가 없는 건 아닌데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의 아내 [[마리 헨리에테 안네]]는 이 문서의 레오폴트 2세의 손녀이기 때문이다. [[분류:신성 로마 황제]][[분류:독일 국왕]][[분류:오스트리아 대공]][[분류:헝가리 국왕]][[분류:크로아티아 국왕]][[분류:보헤미아 국왕]][[분류:모라비아 변경백]][[분류:부르고뉴 공작]][[분류:룩셈부르크 공작]][[분류:브라반트 공작]][[분류:토스카나 대공]][[분류:밀라노 공작]][[분류: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분류:1747년 출생]][[분류:1792년 사망]][[분류:빈 출신 인물]][[분류:카푸친 교회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