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소련 공산당 15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소련 공산당 16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소련 공산당 17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1889년 출생]][[분류:1937년 사망]][[분류:대숙청으로 죽은 인물]][[분류:총살형된 인물]] ||<-2>
{{{+1 {{{#ffe400 '''레프 미하일로비치 카라한''' }}}}}}[br]{{{#ffe400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хан''' }}} || ||<-2> [[파일:레프 카라한.jpg|width=100%]] || || '''{{{#ffe400 본명}}}''' ||[[아르메니아어]]: Լևոն Միքայելի Կարախանյան[br][[한국어]]: '''레본 미카옐리 카라하냔'''|| ||<|2> '''{{{#ffe400 출생}}}''' ||[[1889년]] [[1월 20일]]|| ||[[러시아 제국]] [[티플리스]][* 오늘날 [[조지아]] [[트빌리시]]]|| ||<|2> '''{{{#ffe400 사망}}}''' ||[[1937년]] [[9월 20일]] '''(향년 48세)'''|| ||[[소련]] [[모스크바]]|| || '''{{{#ffe400 국적}}}''' ||[[러시아 제국]]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width=28]] → [[소련]] [[파일:소련 국기.svg|width=28]]|| || '''{{{#ffe400 학력}}}''' ||[[대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했으나 이후 [[톰스크 국립대학교|톰스크 대학교]]에서 졸업함.]|| || '''{{{#ffe400 직업}}}''' ||[[외교관]], [[언론인]]|| || '''{{{#ffe400 정당}}}''' ||[include(틀:소련 공산당)][* 본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멘셰비키에 속했으나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7년 5월 볼셰비키로 전향함.]|| || '''{{{#ffe400 종교}}}''' ||[[무종교]] ([[무신론]])|| || '''{{{#ffe400 배우자}}}''' ||클라브디야 예프레모브나 마나예바,,(1909~1918),,[br]베라 빅토로브나 제네예바,,(1918~1930),,[br]마리나 티모페예브나 세묘노바,,(1930~1937),,|| ||<|10> '''{{{#ffe400 경력}}}'''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대리[* 소련 성립 이전 각 소비에트 공화국은 명목상 독립국가였으므로 각 소비에트 공화국도 명목상 개별적으로 외교를 펼쳤다. 소련 외무부(정식 명칭은 소비에트 연방 외무인민위원회)는 1923년 7월 6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ЦИК СССР) 회기에 통과된 1924년 소련 헌법을 법적 근거로 하여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이때 카라한의 직위는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가 아니라 러시아 외무인민위원 대리였다. 각 서적이나 웹사이트를 보면 1918~1920년 당시 카라한의 직위를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1922년 소련 성립으로 인한 볼셰비키 세력의 성격 변화를 무시한 것이다.][* 대리는 "заместитель"을 번역한 것이다. 외무인민위원은 [[외무장관]]에 해당하며, 대리는 '부-'(副-) 또는 '차-'(次-)에 해당한다. 즉 당시 카라한의 직위는 '외무차관'에 해당한다.] || ||[[1918년]] [[3월]] ~ [[1920년]] || ||주[[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 [[러시아 SFSR]] [[특명전권대사|전권대표]][* [[리가 조약]] 체결 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 개별적으로 전권대표(Полпред, [[특명전권대사|대사]]에 해당)를 파견했다. 왜냐하면 위 각주에서 언급하듯 당시 각 소비에트 공화국은 명목상 독립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자캅카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벨로루시]]가 통합되어 소련을 결성했고, 폴란드 정부는 반년이 지난 1923년 7월 23일 소련의 성립을 인정했다. 이후 소련은 자국을 대표하는 단일 전권대표를 폴란드에 파견했다.] || ||[[1921년]] [[5월 30일]] ~ [[1922년]] [[10월 9일]] || ||주[[중화민국 북양정부|중화민국]] 소련 전권대표 || ||[[1924년]] [[6월 3일]] ~ [[1926년]] [[9월 10일]] ||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 || ||[[1926년]] ~ [[1934년]] || ||주[[튀르키예]] 소련 전권대표 || ||[[1934년]] [[6월 29일]] ~ [[1937년]] [[5월 7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레프 카라한'''은 [[러시아]]와 [[소련]]의 [[외교관]]이다. 1918~1920년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대리, 1926~1934년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를 역임했으며, 1918~1920년, 1921~1922년, 1934~1937년에 각각 폴란드, 중화민국, 튀르키예 전권대표([[특명전권대사|대사]]에 해당)를 지냈다. 1937년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되었다. 국내에는 "카라한 선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 생애 == 1889년 [[러시아 제국]] 서남부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으며 당시에는 [[멘셰비키]]에 속했으나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7년 5월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910~19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했으나 혁명운동 가담 혐의로 1915년 가을 당국에 체포되었고, [[톰스크]]로 유배되어 1916년 [[톰스크 국립대학교|톰스크 대학교]]를 졸업했다. || [[파일:SovietDelegatesAtBrestLitovsk.jpg|width=100%]] ||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러시아측 대표단.''' '''뒷줄 맨 오른쪽이 카라한이다.''' || 러시아 혁명 직후 석방된 카라한은 1917년 10월 혁명군사위원회(Реввоенсовет)에 참여했다. 또한 1918년 3월 [[레프 트로츠키]], 아돌프 요페 등 다른 볼셰비키 지도부와 함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다. 1918년 3월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대리가 되어 1919년 7월 25일 이른바 카라한 선언(Karakhan Manifesto)을 발표했다. 해당 선언의 내용은 기존 제정 러시아가 중국과 체결한 비밀조약을 폐기하며, 종래 러시아가 중국 내에서 누리던 특수 권익을 반환하고, 영사 재판권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중국에서 친소, 용공 분위기가 조성되어 [[4.12 상하이 쿠데타]] 전까지 [[중소관계]]는 매우 우호적으로 변했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과 1924년 [[제1차 국공합작]]도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은 것이다.[* 다만 1921년 12월 중국에 도착한 러시아측 사절단장 알렉산드르 파이케스(Пайкес,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는 카라한 선언을 확인하면서도 무상으로 반환하는 것은 어렵다면서 실질적으로 카라한 선언을 번복했다. 이에 당시 대륙을 통치하던 [[북양정부]]는 크게 반발, 파이케스는 국교 수립에 실패한 채 이듬해 1922년 8월 귀국했다.][* 러시아가 관리하던 [[만주 횡단철도|중동로]] 반환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는 기존 카라한 선언을 번복하고 1924년 5월 31일 베이징 중소협정 체결로 봉천 군벌과 중동로에 대한 권리를 나누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철도 관리권은 루블화를 결산 화폐로 삼고 기무처, 차무처, 상무처, 재무처 등의 주요 부서를 러시아인이 독점하여 결국 러시아(소련)의 손에 남게 되었다. 이에 [[장쉐량]]은 중동로를 회수하려 들었고 결국 양측의 갈등이 폭발하여 1929년 [[중동로 사건]]이 발발한다.] 카라한은 또한 1920년 5월 7일 [[조지아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Moscow_(1920)|모스크바 조약]]에 러시아를 대표하여 조인했다.[* 그러나 조지아를 서방의 전진기지로 여긴 러시아는 조지아의 독립을 용납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1921년 2월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을 일으켜 조지아를 점령한다.] 1921~1922년 주폴란드 전권대표로 파견되었고, 1923~1926년 주중 전권대표로 파견되었다. 주중 전권대표로 재직하던 1925년 1월 20일 주중 일본 공사 요시자와 겐키치(芳澤 謙吉)[* 1932년 일본 제국 외무대신을 지냈다.]와 일소간 국교회복을 목표로 한 [[https://en.wikipedia.org/wiki/Soviet%E2%80%93Japanese_Basic_Convention|일소기본조약]](日ソ基本条約)을 체결했다. 이후 1926~1934년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를 맡았다가 1934년 다시 주튀르키예 전권대표로 파견되었다. 1937년 5월 3일 본국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친파시스트 음모" 가담 혐의로 피체, 1937년 9월 20일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되었다. 시신은 돈스코예 공동묘지에 화장되었다. [[흐루쇼프]] 집권기인 1956년 복권되었다. == 여담 == 당대 최고의 [[미남]]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뒤로 빗겨넘긴 검은 머리와 멋스럽게 기른 반다이크식 수염이었다. 1918년 그와 만난 [[영국]]의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는 회고록에서 카라한을 두고 '''"볼셰비키의 [[아도니스]]"'''라고 불렀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도니스는 최고의 미남이다.] 잘생긴 얼굴에 걸맞게 여성 편력도 화려한 사람이다. 일찍이 1909년 클라브디야 예프레모브나 마나예바와 결혼하여 1916년 아들 미하일까지 두었으나 1918년 [[배우]] 베라 빅토로브나 제네예바와 눈이 맞아서 결혼했다.[* 사실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는데, [[러시아 내전]]으로 러시아가 [[헬게이트]]에 빠지자 마나예바와 아들을 살리려고 그들을 [[스위스]]로 보내어 보호한 바 있다. 그런데 심히 외로웠는지 그만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버린 것이다. 마나예바가 귀국한 후 그녀에게 싹싹 빌었지만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카라한과 제네예바 사이에서는 아들과 딸 각각 1명씩 태어났다. 하지만 1930년에는 무용수 마리나 세묘노바와 '''또''' 눈이 맞아서 [[사실혼]] 관계를 가졌다.[* 소련 초기는 [[전위예술]]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낙태]]가 합법화되며 커밍아웃한 [[게이]]인 게오르기 치체린이 소련 초대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에 오르는 등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자유로웠다. 그러나 [[스탈린]]의 집권 이후 사회 분위기가 갈수록 경직되어가 동성애와 낙태가 범죄화되기에 이른다.] 자녀는 총 3명이 있다. 마나예바와 낳은 아들 미하일(1916~1976), 제네예바와 낳은 아들 유리(1924~1942), 딸 이리나(1926~2019)이다. 이 중에서 유리는 [[독소전쟁]]에 참전,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