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1973년에 세워진 개신교 복음주의의 선교와 사회운동에 대한 결의, rd1=로잔 언약)] [include(틀:제1차 세계 대전 평화 조약)] |언어별 명칭| [[프랑스어]] || Traité de Lausanne[* 조약의 원문이 프랑스어이다.] || || [[터키어]] || Lozan Antlaşması || || [[그리스어]] || Συνθήκη της Λωζάνης(Synthíki tis Lozánis) || || [[영어]] || Treaty of Lausanne || [목차][clearfix] == 개요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지속되던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스위스]]의 도시 [[로잔]]에서 1923년 7월 24일에 체결된 조약. 2023년 7월 24일은 로잔조약 100주년이다. == 상세 == [[튀르키예]],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영국]], [[그리스 왕국]],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되었다. 1920년에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오스만 제국]]이 [[협상국]]과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며 현재 튀르키예 영토 대부분을 확보하게 된 조약으로, 이를 이룩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튀르크 민족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튀르키예 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조약이라 할 수 있다. 이 조약에 따라 동[[트라키아]](Eastern Thracia)가 튀르키예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대신 [[에게 해]]의 섬들은 임브로스와 테네도스를 제외하면 튀르키예 본토인 [[아나톨리아]] 반도 코앞에 있는 것까지 죄다 그리스에게 넘어갔다. 현대 튀르키예 영토의 코앞에 있는 섬들까지 그리스 영토가 된 것은 튀르키예의 해군이 약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튀르키예와 그리스의 현재의 국경선이 설정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이며, [[오스만 제국]]이 세계 대전에서 패배, 항복한 뒤 [[이스탄불]]에 진주한 협상국의 우두머리인 영국인 고등판무관이 [[튀르키예 독립전쟁|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을 지켜보다가 그리스군이 튀르키예군에게 져서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생 튀르키예 정부에 연락해 이스탄불 부근의 동트라키아 아니면 에게 해의 섬들 중 한 쪽을 가지라고 제안하자 튀르키예 정부가 동트라키아를 선택해서 에게 해가 그리스 영해가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그리스가 협상국으로 참가해 이득을 얻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가 튀르키예 영토에 무리하게 욕심을 부렸다가 망할 뻔한 걸 구해준 것이니 마냥 득을 봤다고 보긴 어렵다.[* 당장 동트라키아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그리스가 협상국 편을 든 대가로 받게 된 땅이었는데 튀르키예에게 다시 뺏겼다.] 이 때문인지 이 지역의 영해 범위를 놓고 튀르키예와 그리스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한다. 또한 튀르키예는 튀르크계가 일부 분포하고 있는 [[키프로스]] 역시 포기했다. 이는 이후 키프로스 분단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 조약으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서방에서는 세브르 조약을 파기한 튀르키예 정부에 대한 반감이 강해져서 한 동안은 튀르키예와 어떤 외교 관계도 수립하지 않았고[* 원래 세브르 조약 자체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의 처분을 위한 조약이었다. 즉, 튀르키예와 아타튀르크 입장에서는 민족을 위해 자신들의 조국을 갈기갈기 찢으려 드는 외세와 싸워 독립을 쟁취한 것이기는 했지만 협상국 입장에서 세브르 조약은 엄연히 정당한 조약이었다.], 그래서 튀르키예는 똑같이 국제 왕따 신세였던 [[소련]]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후 냉전 시기에는 튀르키예가 한국처럼 자유진영의 최전선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 에르도안 이후 터키에서의 왜곡 == 2002년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이 집권당이 되면서 부터 점차 로잔 조약을 굴욕적인 조약, 정치적인 조약이라고 여기는 [[튀르키예인]]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타튀르크와 [[이뇌뉘]]가 정치적 욕심을 위해서 단지 세브르 조약보다 덜 굴욕적일 뿐인 로잔 조약을 체결했다는게 그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첫번째로 튀르키예(오스만 제국)는 엄연히 동맹국에 가담하여 패전국이 되었으며, 그럼에도 [[튀르키예 독립전쟁|아타튀르크 등의 분전]]으로 같은 패전국인 [[독일 제국|독일]]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비하면 좋은 대접을 받았다. 독일은 1차대전에 패전하여 [[알자스-로렌]]이나 [[단치히]], 프로이센 지역 일부를 내줘야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예 문자 그대로 공중분해되어 버렸다.이런 점을 고려하면 로잔 조약은 굴욕적 조약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수가 있다. 두번째는 정치적 조약이라고는 하지만, 아타튀르크와 이뇌뉘가 사카리야 강에서 분전하고 있을 사이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칼리프는 이스탄불에서 오히려 [[협상국]]의 지시에 따르고, 그리스군이 튀르크인을 학살해도 못본척 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타튀르크와 이뇌뉘가 정치적 조약을 체결했다고 보기에는 무리수가 있다. 정치적 야망이라고 폄하하기에는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고 있다. 세번째는 에게해의 많은 섬을 포기해야 했다는 점인데, 튀르키예는 엄연히 패전했고, 패전에 대해서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만일 아타튀르크가 영국의 제안을 따르지 않았다면 영국은 더 가혹한 조약을 내세우거나, 아예 군대를 이끌고 와 튀르키예 국민군을 굴복시켰을 것이다. 모술이 산유지인지 몰랐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고, 키프로스는 이미 19세기에 영국에 넘어간지 오래였다. 네번째는 협상의 측면을 고려하면 꼭 튀르키예가 잃은 것만은 아니다. 배상금 대신에 동트라키아 영토를 더 확보했으며 괵체아다 섬의 경우는 확보하였다. 협상이라는 것은 무조건 얻는 것만 있을 수는 없으며, 튀르키예는 패전국이었고, 식민지화 될 위기였다는걸 고려하면 꼭 잃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로잔 조약이 아니었다면 튀르키예는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을 것이며, 아나톨리아의 북부만 남아서[* [[이스탄불]]과 서부 아나톨리아는 그리스인들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작은 농업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과 에르도안의 지지자의 논리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의 일방적인 폄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로잔 조약이 최소한 굴욕적인 조약은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도안은 아나트바크르 앞에 이슬람 사원을 크게 지을 계획을 하거나, 튀르키예 교육부의 역사 연표에서 로잔 조약을 뺀다던가 하는 식으로 독립전쟁의 피로 세워진 나라의 근원을 부정하고 있다. [[분류:그리스의 역사]][[분류:튀르키예의 역사]][[분류:그리스-튀르키예 관계]][[분류:전간기]][[분류:1923년 협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