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프랑스의 백작]][[분류:부르봉콩데 가문]][[분류:프랑스의 군인]][[분류:1709년 출생]][[분류:1771년 사망]][[분류:베르사유 출신 인물]] ||<-2> '''클레르몽 백작[br]{{{+1 루이 드 부르봉콩데}}}[br]Louis, Comte de Clermont'''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800px-1771_portrait_painting_of_Louis_de_Bourbon,_Count_of_Clermont_by_François_Hubert_Drouais.jpg|width=100%]]}}} || || '''이름''' ||루이 드 부르봉콩데[br](Louis de Bourbon-Condé)|| || '''출생''' ||[[1709년]] [[6월 15일]][br][[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사망''' ||[[1771년]] [[6월 16일]] (62세)[br][[프랑스 왕국]] [[파리(프랑스)|파리]]|| || '''아버지''' ||콩데 공 루이 3세|| || '''어머니'''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딸이다. 즉 적녀가 아니다.]|| || '''형제''' ||마리 안 엘레오노르, 루이 앙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루이즈 안, 마리 안, 샤를, 앙리에트 루이즈, 엘리자베트 알렉상드린||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군인]]. 클레르몽 백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 일생 == === 초기 경력 === 클레르몽 백작은 루이 3세 드 부르봉 콩데와 마드무아젤 드 낭트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이 지극해 성직자 교육을 받았고, 1729년에 그의 이름을 단 과학 및 예술 아카데미를 설립해 많은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초빙했다. 1733년, 클레르몽 백작은 [[교황]] [[클레멘스 12세]]로부터 군 생활을 할 수 있는 특별 허가를 받았고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35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네덜란드]] 전역에 참가했다.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클레르몽 백작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해 1743년 6월 27일 [[데팅겐 전투]]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으나 아군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그후 [[프랑스]] 궁정에 입회할 자격이 주어진 그는 [[퐁파두르 부인]]의 최측근이 되어 그녀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전투 준비를 할 때 항상 그녀의 코케이드를 들고 다녔다. 전쟁이 끝난 후, 클레르몽 백작은 프랑세이즈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 7년 전쟁 === 7년 전쟁이 발발한 후, 클레르몽은 퐁파두르 부인의 지원에 힘입어 1758년 [[라인강]] 전선의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그해 2월 14일, 클레르몽 백작은 프랑스 육군 사령관으로서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 그 유명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종손이었다. 루이 14세의 대자이기도 했다.]를 대체하기 위해 하노버에 도착했다. 그러나 리슐리외 공작은 일주일 만에 가버렸고, 클레르몽 백작은 제대로 된 인수인계 없이 군대를 지휘해야 하는 난관에 처했다. 게다가 리슐리외 공작이 부대 관리를 어찌나 개판으로 했는지, 클레르몽 백작이 자신의 군대의 상태에 대해 [[루이 15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을 정도였다. >폐하의 군대는 3갈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한 부대는 약탈자와 살인자로 구성되어 있고, 2번째 부대는 땅에 묻혀져 있으며, 3번째 부대는 병원에 있습니다. 첫 번째 부대와 함께 후퇴할까요, 아니면 다른 부대와 합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그 후 연합군이 겨울 공세를 감행하자, 클레르몽 백작은 이 엉망진창인 군대를 어렵사리 수습해 라인강으로 퇴각했다. 1758년 6월 초, 클레르몽은 라인강 서부로 패주한 뒤 6월 23일 [[크레펠트 전투]]에서 형편없는 지휘력을 선보여 연합군에게 패퇴했다. 이후 그는 지휘권을 반납하고 자신의 군대를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슴]]에게 넘겨줬으나, 콩타드 후작 역시 1759년 8월 1일 [[민덴 전투]]에서 지리멸렬한 지휘력을 보여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지휘권을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에게 넘겨줬다. === 말년 === 전쟁이 끝난 후, 클레르몽 백작은 프랑스군 재편성 작업에 참가했고 1765년 자신과 함께 살고 있던 오페라 무용사 엘리사벳 클레어 레비와 극비리에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다. 이후 1771년 6월 16일, 클레르몽 백작은 숨을 거두었다. 향년 6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