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85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br]{{{-1 [[라틴어]]: Lucius Valerius Flacc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5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시아 속주 [[니코메디아]]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95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증조부)[br][[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52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조부)[br]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아버지)[br][[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형제)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86년 || ||<#800080> {{{#ffffff '''전임''' }}} || [[가이우스 마리우스]][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br][[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기원전 8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아 동방으로 파견되었지만 부하들의 배신으로 피살당했다. == 생애 == [[고대 로마]]에서 가장 저명한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발레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 중에서도 플라쿠스 지파는 메살라 지파와 함께 기원전 2세기부터 발레리우스 씨족 중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쳤다. 증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95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9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대 카토]]와 함께 감찰관을 맡았다. 조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52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5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형제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93년 집정관을 맡았다. 사촌으로 기원전 100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00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있었다. 기원전 99년 [[조영관]]을 역임한 그는 기원전 99년 12월 10일 호민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아풀레리우스 데키아누스로부터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지지자들을 학살할 때 가담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재판 결과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후에도 경력을 이어간 것을 볼 때 무죄를 선고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93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연설 도중에 스카우루스라는 재무관이 직속 상사인 플라쿠스를 법정에 회부하려 했으나 원로원으로부터 금지되었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이 플라쿠스가 법무관으로서 아시아 속주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훗날 아시아 도시들은 그를 기리는 경기를 개최할 비용을 지불했다. 이 돈을 트릴리 시에서 모였고,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이것을 소유했다.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추종자들이 장악한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에 가담하여 로마에 입성하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86년 1월 대숙청을 단행한 뒤 7번째 집정관에 선출된 후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방으로 출정한 술라를 토벌할 준비에 착수하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킨나는 수 개월간 단독 집정관을 맡다가 여름에 플라쿠스를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했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막대한 빚을 진 로마인들이 심각할 정도로 늘어난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은이 아닌 구리돈으로 빚의 1/4만 지불하면 부채를 탕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86년, 2개 군단을 이끌고 동방으로 출진했다. 이 원정의 목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노스]]는 그의 공식 임무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 수행이지만 실제 임무는 술라를 토벌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헤라클레아의 멤논]]에 따르면, 그는 술라와 협조하기를 원하는 원로원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브룬디시움에서 출항할 때 폭풍우를 만나 큰 손실을 입었고, 뒤이어 [[지중해]] 해상에서 미트리다테스 함대에게 요격당해 또다시 큰 손실을 입고 일부 분견대가 술라 편으로 넘어가버리는 등, 원정은 초반부터 안 좋게 흘러갔다. 당시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이던 술라는 플라쿠스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그 쪽으로 돌렸다. 양군은 테살리아의 메이테아 시 인근에서 조우했다. 양측은 얼마 동안 대치하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플라쿠스는 북쪽의 마케도니아로 갔고, 술라는 남쪽의 보이오티아로 향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두 사령관이 미트리다테스 6세에 대한 공동 대응을 하기로 합의했거나 병사들이 술라 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플라쿠스가 일부러 술라와의 결전을 미루고 미트리다테스 6세부터 치기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플라쿠스는 마케도니아를 통과하여 비잔티움으로 이동한 뒤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칼케돈에 진입했다. 그러나 그는 비잔티움에서 부관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핌브리아는 상관이 칼케돈에 먼저 건너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은 병사들에게 플라쿠스가 전리품 일부를 숨기고 있다고 선동해 그들을 자기 편으로 삼았다. 이 소식을 접한 플라쿠스는 도로 비잔티움으로 돌아가 핌브리아를 처단하려 했지만,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마저 핌브리아 편으로 귀순해버리자 칼케돈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니코메디아로 이동했다. 그 후 그곳의 우물에 숨었다가 핌브리아 추종자들에게 체포된 뒤 참수되었다. 잘린 머리는 바다에 던져졌고, 남은 시신은 매장되지 않고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방치되었다.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63년에 법무관을 맡았으며, [[카틸리나 탄핵]]을 주동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