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1세기)] || '''이름'''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br](Lucius Annius Vinicianus)|| || '''출생''' ||미상, 로마 제국 이탈리아|| || '''사망''' ||[[42년]], 로마 제국 로마|| || '''직위''' ||원로원 의원, 집정관||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이자 반역자. 원한과 복수심으로 [[칼리굴라]] 암살을 계획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남은 후손 [[클라우디우스 1세]]까지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으로 유명하다. 동명이인의 아들과 구분하기 위해 종종 대(大)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로 불리기도 한다. == 생애 == 전직집정관 가이우스 안니우스 폴리오와 그 아내 비니키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삼촌은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의 막내딸과 결혼한 마르쿠스 비니키우스다.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나, 부모 모두 세습 원로원 의원 가문 출신의 오래된 명망가인 만큼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서기 32년, 아버지 폴리오와 함께 원로원에 [[세야누스]] 일파로 몰려 고발됐다. 그래서 제대로 경력이 꼬일 위기에 처했는데, 당시 황제인 [[티베리우스]]가 손수 고발장을 파기해주면서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비니키아누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게 불만을 품었다. 일찍부터 외삼촌과 동서지간인 방계황족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우정을 쌓았다. 그래서 레피두스와 그 아내 율리아 드루실라 공주의 추천으로 서기 38년 아르발 형제 사제단 멤버가 됐고, 당시 황제인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 추천받아 39년과 40년 사이 집정관까지 지냈다. 율리아 드루실라가 요절하고, 우정을 쌓은 레피두스가 칼리굴라의 두 여동생과 공모해 칼리굴라 암살을 모의하다가 기소된 이후에도 승승장구했으나 칼리굴라를 암살하려고 별개의 음모를 꾸몄고 서기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 암살일에 칼리굴라가 가진 황제 자리를 노리고 노골적으로 이를 계승하려고 했다. 이때 비니키아누스는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와 황제 자리를 놓고 노골적으로 경쟁을 했는데, 그 사이 프라이토리아니가 암살범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을 제압하고 황숙 [[클라우디우스 1세]]를 새 황제로 선포해 이를 원로원에 통보했다. 따라서 비니키아누스는 제위에 오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서기 42년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비니키아누스는 스크리보니아누스를 지원해주면서, 클라우디우스가 퇴위까지 고려함을 알고 이를 설득하면서 그 야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스크리보니아누스의 반란은 싱겁게 끝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원로원이 반격하면서 비니키아누스는 스크리보니아누스와 함께 체포 전 자살했다. 알 수 없는 해에 이름 미상의 아내와 결혼해 아들을 두 명 뒀다. 이중 장남 소(小)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는 칼리굴라의 손윗처남 [[코르불로]] 딸과 결혼했는데, 후일 베네벤툼 음모를 주동한 혐의로 자살했다. 차남인 안니우스 폴리오 역시 서기 65년 피소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반역죄로 처형됐다. [[분류:1세기 집정관]][[분류:42년 사망]][[분류:로마 제국 집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