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br]{{{-1 [[라틴어]]: Lucius Calpurnius Piso Caesoni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조부)[br][[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180년 집정관)|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버지)[br][[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112년 집정관)|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아들)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48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기원전 149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br][[마니우스 마닐리우스]] || ||<#800080> {{{#ffffff '''동기''' }}}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그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br][[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불명예스럽게 군사 지휘권을 사실상 박탈당한 로마 장군으로도 유명하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마지막 아내 [[칼푸르니아]]의 직계 조상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생애 ==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노빌레스]])이다. 이 가문에는 여러 분파가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저명한 분파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엄청난 위세를 떨친 피소 가문이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기원전 180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180년 집정관)|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그의 아버지라고 추정한다. 일각에서는 이 인물이 카이소니우스 씨족 가문에서 입양된 피소 가문 사람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의 코그노멘 뒤에 붙은 카이소니누스는 입양된 사람에게 붙여진 사람들이 쓴 '-anus' 형태의 '카이소니아누스'가 아니다. 따라서 이 주장은 소수에게만 인정받고 있다. 게다가 피소 가문 일원들은 이 사람처럼 외가 성씨 뒤에 이렇게 변환해 대대로 물려받아 쓰거나, 다른 이유로 이렇게 이것을 물려받아 피소 가문 내에서 다시 지파를 구분한 특징이 있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기원전 155년 또는 154년에 [[마니우스 마닐리우스]]와 함께 히스파니아 속주를 통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가까운 히스파니아와 먼 히스파니아 속주 중 어디에 부임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마닐리우스와 카이소니누스는 루시타니아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했지만, 뒤이은 전투에서 [[재무관]] 바로를 포함한 6,000명의 병사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그는 곧 로마로 돌아갔고, [[원로원]]은 이에 대응해 [[루시타니아 전쟁]]을 단행했다. 기원전 148년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그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어진 추첨 결과,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는 전임 집정관들과는 달리 카르타고를 무리하게 점령하려 시도하지 않고 그 주변의 도시들을 복속시켜서 카르타고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실시했다. 그러나 다른 도시들 역시 공략하지 못하면서 로마군의 입지는 약화되었고, 카르타고인들은 잃었던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탈환했다. 앞서 무기를 모조리 몰수했기에 카르타고인들이 쉽게 무너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고전을 면치 못하자, 로마 시민들은 격분해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을 무시하고 기원전 147년 집정관에 피소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역임하고 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선출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112년 집정관)|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기원전 11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