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 }}}[br]{{{-1 [[라틴어]]: Lucius Cornelius Lentulus Cruscellio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아버지)[br]술피키아(아내)[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들)||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38년 || ||<#800080> {{{#ffffff '''전임''' }}}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38년 집정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br][[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기원전 38년 집정관)|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38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800080> {{{#ffffff '''후임''' }}}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br][[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기원전 37년 집정관)|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 렌툴루스 지파의 일원이다. 기원전 49년 집정관이며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맞섰지만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한 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살해당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의 아들로, 아그노멘 '크루스켈리오(Cruscellio)'는 크루스의 아들을 의미한다. 기원전 54년 시리아 전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원로원의 동의 없이 이집트로 쳐들어가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키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보낸 1만 달란트를 갈취한 혐의로 고발했다. 첫 재판에서는 가비니우스의 후원자인 폼페이우스가 비호해주고 고발측 변호인을 맡았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도 폼페이우스와의 관계를 고려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이면서, 배심원 70명 중 38명이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패소했다. 하지만 첫번째 재판 직후 [[테베레 강]]이 범람하여 여러 주거지를 덮치는 일이 벌어지자, 민중은 신들이 명백한 범죄자의 무죄를 선고한 것에 분노했다고 여겼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비난했다. 이 분위기를 등에 업고 다시 고발해 이번에는 유죄 판결을 받아냈고, 가비니우스는 막대한 벌금을 내지 못하게 되자 망명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로마의 정국이 혼란에 빠지던 기원전 44년 무렵에 [[법무관]]을 역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 의해 숙청 대상으로 낙인찍혔는데, 아마도 카이사르와 맞서 싸웠던 아버지 때문인듯 하다. 그는 추적을 피해 시칠리아로 피신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보호를 받았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아내 술피키아는 남편을 따라가기로 마음먹고 노예 소녀처럼 옷을 입고 2명의 노예 소녀와 2명의 노예 소년과 함께 시칠리아로 향했다. 시칠리아에 막 도착한 그녀는 남편을 곧 발견했다. 당시 렌툴루스는 썩은 음식을 먹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도랑에서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조약이 체결되면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망명했던 정치인들이 로마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즉시 로마로 귀환한 뒤 안토니우스의 지지자가 되었고, 기원전 38년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38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기원전 3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