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 }}}[br]{{{-1 [[라틴어]]: Lucius Porcius Lici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조부)[br]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아버지)[br]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84년 || ||<#800080> {{{#ffffff '''전임''' }}}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185년 집정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br][[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기원전 185년 집정관)|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184년 집정관)|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800080> {{{#ffffff '''후임''' }}}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83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br][[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투스쿨룸 출신의 [[플레브스]] 가문이었다가 로마로 이주한 뒤 [[대 카토]]부터 로마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포르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버지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는 기원전 207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93년 [[법무관]]에 선임되어 [[사르데냐]]를 통치했다. 기원전 186년 집정고나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기원전 185년 집정관 선거에 재차 출마했다. 당시 선거엔 그 외에도 6명이 출마했는데, 그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184년 집정관)|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집정관에 최종적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로마 정치인들은 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185년 집정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자기 동생 푸블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세우려고 노골적으로 밀어주는 것에 비난을 퍼부면서도 그가 집정관이 된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기원전 184년 동료 집정관과 함께 리구리아에 부임해 전임 집정관들이 벌인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집정관 임기 동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원정을 이끄는 동안 베누스 에리키나 여신을 위한 신전을 건설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 신전은 기원전 181년에 봉헌되었다. 한편, 그는 수석 [[조영관]]을 맡았던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79년 집정관)|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법무관]] 후보로 출마하는 것을 막았으며, [[감찰관]]을 놓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을 때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95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와 [[대 카토]]가 당선되는 것을 지원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는 기원전 181년 두움비리(Duumviri: 사원 봉헌 감독관)를 맡았고 기원전 172년 로마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