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br]{{{-1 [[라틴어]]: Lucius Hostilius Manci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조부)[br]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아버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45년 || ||<#800080> {{{#ffffff '''전임''' }}}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46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br][[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 || ||<#800080> {{{#ffffff '''동기'''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기원전 144년 집정관)|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br][[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기원전 144년 집정관)|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플레브스]] 가문인 호스틸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기원전 170년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집정관에 선임된 이래 [[노빌레스]]로 승격되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휘하 이탈리아 연합군 기병 분견대를 이끌고 [[한니발 바르카]]에 대적하다 캄파니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그의 조부일 수 있다고 추정하며, 아버지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기원전 170년 집정관 아울루스의 형제인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148년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 또는 [[법무관]]으로서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148년 집정관)|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휘하 로마 함대를 이끌었다. 기원전 147년 피소가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내륙에서 작전을 펼치는 동안, 그는 해상에서 카르타고를 공격해 요새의 한 구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인들이 곧 반격을 가해와서 몰살당할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버티다가 기원전 147년도 집정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끄는 함대가 다가오자 카르타고군이 철수한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후 로마로 귀환한 그는 전쟁 영웅으로서 큰 인기를 얻었고, [[포로 로마노]]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쟁 경험담을 실감나게 설명했다. 그 덕분에 기원전 145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파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먼 히스파니아 속주로 가서 [[루시타니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행정을 맡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