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 [[영어]]: Peace of Riga * [[폴란드어]]: Traktat ryski * [[러시아어]]: Рижский договор * [[우크라이나어]]: Ризький мир [[1921년]] [[3월 18일]] [[폴란드 제2공화국]]과 [[볼셰비키]]([[러시아 SFSR]], [[우크라이나 SSR]]) 사이에 체결된 강화조약. 이 조약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종결되었다. 리가는 지금의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를 말한다. 리가에서는 전 해인 1920년 8월 11일 라트비아와 볼셰비키 사이에 또다른 [[https://en.wikipedia.org/wiki/Latvian%E2%80%93Soviet_Peace_Treaty|리가 조약]]이 체결되었다. 라트비아는 이 조약으로 볼셰비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 배경 ==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해 말 독일이 패망하자 볼셰비키는 조약을 파기하고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동유럽을 전면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침공]]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당했는데, 그 중 벨라루스는 멸망해버렸고 우크라이나도 수도 [[키이우]]를 점령당하고 멸망 직전에 내몰렸다. 한편 1918년 독립한 [[폴란드]]는 구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재건하려 시도하였고, 이것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 회복과 나아가 [[중유럽]]의 공산화를 꾀하던 러시아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멸망시키고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이 나라들과 인접한 폴란드의 공포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1919년]] 2월 폴란드가 벨라루스 서쪽까지 진출한 [[붉은 군대]]에 먼저 선공을 걸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켰다.[* 물론 폴란드는 이렇게 볼셰비키의 중유럽 진출에 맞서 싸우면서도, 동시에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일대를 점령하고(붉은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곳을 그대로 차지함)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멸망시키는 등 다른 약소국의 영토를 쳐묵쳐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국경분쟁이었던 이 전쟁은 [[1920년]]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의 원조 요청을 받아 키이우로 원정군을 파병하여 전면전으로 격화되었다. 러시아는 키이우와 벨라루스에서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군을 격파하고 역공을 걸어 폴란드 영내로 진격했으나, 8월 폴란드는 [[바르샤바 전투(1920년)|바르샤바 전투]]에서 붉은 군대를 격파하여 전세를 다시 유리하게 돌렸다. 붉은 군대는 연패하여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쫓겨났다. 1920년 말 전쟁을 지속할 경제적 능력이 고갈된 폴란드와 러시아는 10월 12일 일단 [[휴전]]에 조인했다. 그후 1921년 3월 18일 양측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정식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 내용 == || [[파일:Treaty_of_Riga.jpg|width=100%]] || [[파일:Rzeczpospolita_1937.svg.png|width=100%]] || ||<:> 리가 조약의 [[폴란드어]] 버전 2쪽. ||<:> 조약으로 확정된 폴란드-볼셰비키 국경선 || 조약은 총 26개조로 구성되었다. 1조는 쌍방의 전쟁 상태의 종식을 명시했다. 2조는 쌍방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하고 폴란드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사이의 국경선을 형성함을 명시했다. 또한 국경선을 세부적으로 설정했다. 3조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여기서는 [[우크라이나 SSR]]을 가리킴.]가 서부 국경 너머 폴란드 영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마찬가지로 폴란드도 동부 국경 너머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영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함을 명시했다. 4조는 쌍방의 [[주권]] 존중을 명시했다. 11조는 [[1772년]] 1차 [[폴란드 분할]] 이래 러시아가 폴란드에서 자국으로 이전한 모든 미술 소장품, 기록물, 장서들을 폴란드로 반환하며, 13조는 폴란드가 러시아에 남은 자산을 포기하는 대가로 3천만 [[금]][[루블]]을 지불받음을 명시했다. 24조는 양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함을 명시했다. 조약은 폴란드 의회에서 1921년 4월 15일에,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에서 각각 4월 14일과 17일에 비준되었다. 5월 3일 쌍방은 [[민스크]]에서 각서를 교환했다. 조약은 1939년 9월 17일 [[폴란드 침공|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함에 따라 파기되었다. == 영향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raktat_ryski_1921.jpg|width=100%]]}}} || || 1921년 3월 18일 강화조약에 조인하는 양측 대표단. || 1918년 독립 이래 폴란드 내에서는 폴란드 민족과 다른 동유럽 제민족 간의 연합을, 그리고 최종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부활을 꾀하는 '''연방주의파'''와 폴란드 민족의 민족국가 수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파'''가 대립해왔다. 리가 조약 체결은 폴란드의 대외노선을 둘러싼 내부 논쟁에서 민족주의파가 승리했음을 뜻했다. 폴란드의 지도자이자 연방주의파의 거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실무협상에 참여하지 못하고 단지 참관인으로만 참여했을 뿐이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 조약을 두고 "비겁한 행동"이라고 부르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폴란드가 리가 조약을 체결하여 대 소비에트 전쟁에 참여한 동맹국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을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행동은 1920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가 동맹을 체결한 바르샤바 조약도 위반하는 것이었는데, 이 조약에서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우크라이나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바 있으며, 개별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패배한 것은 폴란드의 연방주의파뿐만이 아니었다. 겉보기에 폴란드는 동부 국경지대의 영토를 대거 확보했지만, 이 지역은 군사적으로는 방어하기 어려운데다 경제적으로는 크게 낙후된 지역이었다. 벨라루스 내에서 그나마 발전된 [[민스크]] 일대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말기 폴란드가 재점령했지만, 폴란드 국경선 내에 소수민족을 더 늘리면 안된다는 민족주의파의 반발로 결국 이 지역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간에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민족주의 진영을 배반한 것이 되었고, 전간기 내내 폴란드는 결국 두 민족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볼셰비키는 원래 목표했던 러시아 제국 영토 수복과 중유럽 진출, 그리고 세계 혁명 전략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폴란드를 상대로 군사적 패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벨라루스의 절반과 우크라이나의 5/6를 차지하는 등 꽤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했고, 나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폴란드의 개입도 끝내 우크라이나가 분리독립을 시도할 가능성을 차단했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이 전쟁으로 자민족이 거주하는 영역이 폴란드와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결국 이러한 분할은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침공|폴란드를 침공]]하여 [[독소 폴란드 점령|폴란드를 5번째로 분할]]함으로써 끝났다. [[분류:1921년/사건사고]][[분류:러시아 내전]][[분류:20세기 협정]][[분류:러시아-폴란드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