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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순.jpg]] || ||<-3> '''{{{#white 중화민국 장강순열사 겸 소환강 삼성 순열사}}}''' || ||<-2> '''{{{#white 정체}}}''' ||李純 || ||<-2> '''{{{#white 간체}}}''' ||李纯 || ||<-2> '''{{{#white 한국식 독음}}}''' ||[[이순]] || ||<-2> '''{{{#white 영문}}}''' ||Li Chun || ||<-2> '''{{{#white 자}}}''' ||수산(秀山) || ||<-2> '''{{{#white 출생}}}''' ||[[1867년]] [[9월 12일]] 청나라 [[허베이성|직예성]] [[톈진시]] || ||<-2> '''{{{#white 사망}}}''' ||[[1920년]] [[10월 12일]] [[중화민국]] 강소성 [[난징]] || ||<-2> '''{{{#white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8]] → [[중화민국/북양정부|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width=28]] || ||<-2> '''{{{#white 학력}}}''' ||[[천진무비학당]] || ||<-2> '''{{{#white 직업}}}''' ||[[군인]], [[정치가]] || [목차] == 개요 == [[군벌/중화민국|중화민국의 군벌]]. [[직계군벌]]의 일원으로 [[돤치루이]]의 무력통일 정책에 반대하여 평화통일을 주장한 <장강삼독> 중 한명이었다. == 생애 == === [[호국전쟁]]까지 === 1867년 [[허베이성|직예성]] [[톈진]]에서 태어났다. [[천진무비학당]] 졸업 이후 [[위안스카이]]의 북양신군에 참여했다. 이후 북양육군 제1진 기병영 영대, 기병영 표통, 기병영 협통을 역임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펑궈장]] 휘하에서 사망한 전 6진 통제 오록정을 대신하여 6진 통제에 임명되어 남하하여 혁명군과 싸웠고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6사단장 겸 상남초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13년 위안스카이의 지시로 5월 5일 하남성 신양, 다시 7월 2일 강서성 구강에 파견되어 [[계축전쟁]]을 진압했고 그 공으로 강서도독에 임명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 이후 [[옌시산]], [[자오티]], [[탕지야오]], 탕향명, 진이 등과 함께 1등 후작에 봉해졌다. 얼마 안가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가 운남성에서 봉기하여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용제광]], [[장쉰]], [[펑궈장]], [[돤즈구이]], [[니쓰충]]과 함께 호국군 토벌을 통전했으나 호국군의 기세가 강성해지자 3월 20일, [[장쉰]], [[펑궈장]], [[진윈펑]]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제제 취소를 촉구하는 연명 통전을 보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다. === [[호법전쟁]]과 [[안직전쟁]] ===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부총통 [[리위안훙]]이 계임하여 구국회와 약법을 회복시킴으로 호국전쟁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워졌는데 1917년 5월 돤치루이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막무가내로 요구하며 깡패들을 풀어 국회의원을 두들겨패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국무총리에서 면직되자 돤치루이는 분노하여 내전을 준비했다. 겁이 난 리위안훙이 중재를 청하며 부른 장쉰은 난데없이 국회를 해산하고 [[선통제]]를 복위시켜 청조의 부활을 선언했다가 환계, 직계, 서남군벌들이 대동단결해서 토벌하는 바람에 12일 만에 망했다. 1917년, 7월 [[장훈복벽]]으로 리위안훙이 사퇴하면서 대총통에 계임한 부총통 펑궈장이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을 견제하기 위해 진광원을 강서독군으로 승진시킨 다음 리춘을 강소독군에 이임시켰다.[* 돤치루이도 이에 맞서 [[푸량쭤]]를 호남독군으로, [[우광신]]을 사천사판사 겸 장강상류경비총사령으로 임명했다.] 이후 [[쑨원]]이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여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진광원과 함께 대총통 [[펑궈장]]의 평화통일정책에 호응하여 [[호법전쟁]]에 반대, 적극적으로 평화를 주장했다. 11월 리춘은 [[차오쿤]], [[왕잔위안]], [[진광원]]과 연명으로 내전 정지를 통전하여 돤치루이 내각의 하야와 [[왕스전]] 내각의 출범, 일시적인 정전령을 끌어내는데 성공했으며 1월 31일 쑨원에게 통전을 보내 자신이 무력통일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안휘파의 대표적 주전론자 [[쉬수정]]이 [[장쭤린]]의 [[봉천군벌]]을 끌어들여 주전론을 강화하자 사직까지 거론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허지만 쉬수정의 선동에 [[옌시산]] 등이 연명으로 토벌을 주장하고 차오쿤도 주화론에서 이탈하면서 더 이상 무력통일에 저항할 수 없게 되었고 [[돤치루이]] 내각이 부활했다. 1918년 10월 [[쉬스창]] 총통의 당선으로 11월에 정전령이 선포, 1919년 2월에 상하이에서 남북평화회의가 개최되자 남방과 실무접촉을 맡았고 화의가 결렬된 후에도 화의 재개를 위해 노력했다. 1920년 [[쉬수정]], [[취퉁펑]] 등 환계 주전파의 횡포가 심해지자 이에 대항하여 [[차오쿤]], [[장쭤린]], 손열신, 진광원, [[왕잔위안]], 포귀경 등과 함께 환계에 대항하는 8성 동맹을 체결했다. 환계와 직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자 대총통 [[쉬스창]]으로부터 정치적 중재에 나서달란 부탁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1920년 7월 3일 [[장쭤린]], [[차오쿤]]과 연명으로 쉬수정 토벌을 통전하여 [[안직전쟁]]에 임했고, 안휘군벌을 크게 무찔러 승리했다. === 갑작스러운 죽음 === [[안직전쟁]] 종결 이후 1920년 9월 [[니쓰충]]이 가지고 있던 장강순열사 자리를 차지했으며 또한 소환강 삼성 순열사에 임명되었다. 1920년 10월 10일 영위대장군에 봉해지는 등 장쭤린, 차오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정신질환이 있었기 때문에 10월 12일 갑작스럽게 권총자살하였다. 그가 죽은 후 강소의 기반은 휘하의 [[치셰위안]]이 물려받았으며 후임 소환강 삼성 순열사에는 북양삼걸의 일원이자 전 국무총리인 [[왕스전]]이 임명되었다. == 참고문헌 ==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直皖戰爭과 奉天軍閥의 關內進出, 송한용, 중국사연구 28권 28호, 중국사학회 == 관련문서 == * [[신해혁명]] * [[계축전쟁]]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외몽골 출병]] * [[안직전쟁]] [[분류:직계군벌]][[분류:1867년 출생]][[분류:1920년 사망]][[분류:중국의 자살한 인물]][[분류:톈진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