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카이사르)]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4세기)] [include(틀:로마 제국의 전제정)] ||<-2> '''{{{#fecd21 로마 제국 카이사르[br]{{{+1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 }}}}}}''' [[파일:리키니우스 2세.jpg|width=100%]] || || '''휘'''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br](Valerius Licinianus Licinius)|| || '''생몰 년도''' ||315년 7/8월 ~ 325년|| || '''카이사르 재위 기간''' ||317년 3월 1일 ~ 324년 9월 18일|| || '''아버지''' ||[[리키니우스]]|| || '''어머니'''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 317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의 합의에 따라 [[크리스푸스]], [[콘스탄티누스 2세]]와 함께 카이사르로 지명되었다. 324년 9월 18일 아버지 리키니우스와 함께 퇴위한 뒤 테살로니카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325년 처형되었다. == 생애 == 315년 7/8월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와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 누이인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의 아들로 출생했다. 316년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시르미움에 어머니와 함께 있ㅇ써다. 317년 3월 1일,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진 것에 중압감을 느낀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아우구스투스 직위를 유지하는 대신 트라키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의 모든 영역을 콘스탄티누스에게 넘겨야 했으며, 공동 황제로 내세웠던 [[발레리우스 발렌스]]를 처형하는 것 역시 받아들였다. 이때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 아들인 [[크리스푸스]], [[콘스탄티누스 2세]]와 함께 카이사르에 지명되었다. 319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321년 아버지와 함께 2번째로 집정관을 맡았다. 당시 리키니우스와 갈등을 벌이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서쪽에서 크리스푸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에 내전이 또다시 발발했고, 리키니우스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헬레스폰트 해전과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연전연패했다. 리키니우스는 니코메디아로 피신한 뒤 전쟁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의 아내 콘스탄티아가 이제라도 항복해야 목숨을 건진다고 설득하자 결국 항복하기로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복누이 콘스탄티아의 간절한 청원을 받아들여 리키니우스 부자를 살려주되 모든 직위에서 퇴위한 뒤 테살로니카에서 조용히 지내게 했다. 그러나 325년 초 리키니우스가 고트족과 내통하여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될 때 함께 처형되었다. [[분류:카이사르]][[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4세기 집정관]][[분류:퇴위한 군주]][[분류:315년 출생]][[분류:32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