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나치 독일 식품 농업 장관)]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
<#DD0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0101 0%, #CC0000 20%, #CC0000 80%, #B70101)" '''{{{#white 식품농무국가장관 겸 나치당 농업정책국장[br]{{{+2 리하르트 발터 다레}}} [br]Richard Walther Darré}}}'''}}}|| ||||<#ffffff><:>{{{#!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리하르트 발터 다레.jpg|width=100%]]}}} || ||<:><#DD0000>'''{{{#white 본명}}}'''||'''Richard Walther Darré'''[br]리하르트 발터 다레 || ||<|2><:><#DD0000>'''{{{#white 출생}}}'''||[[1895년]] [[7월 14일]] || ||[include(틀:국기, 국명=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 ||<|2><:><#DD0000>'''{{{#white 사망}}}'''||[[1953년]] [[9월 5일]] (향년 58세) || ||[[파일:독일 국기.svg|width=25]] [[서독]] [[뮌헨]] || ||<:><#DD0000>'''{{{#white 정당}}}'''||[include(틀: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DD0000>'''{{{#white 시민권}}}'''||[[독일인]]|| ||<:><#DD0000>'''{{{#white 최종계급}}}'''||[[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국가지휘자(Reichsleiter) [br] [[돌격대(나치 독일)|돌격대]] [[중장]] [br] [[친위대(나치 독일)|친위대]] [[대장(계급)|대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다레ss.jpg|width=100%]] || || '''리하르트 발터 다레 (Richard Walther Darré)''' || [[나치 독일]]의 친위대 대장이자 식품농무국가장관을 역임했다. == 초기 행적 == 리하르트 발터 다레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의 마을인 베르그라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인]], 어머니는 [[스웨덴인]]으로 아버지는 무역회사의 중역이었다. 양친의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지만 집안은 부유하여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독일로 귀국하기 전까지 그는 개인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했었다. 다레는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의 4개 국어에 능통했는데 양친은 그가 9살일때 독일로 이주해 [[하이델베르크]]로 이사했다. [[1911년]]에 다레는 교환학생으로서 윔블던의 킹스 컬리지 스쿨에 다녔다. 그 후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1914년]]부터 [[괴팅겐]] 남부의 비첸하우젠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농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 비첸하우젠에서 한 학기를 다닌 후 군대에 지원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다시 농업에 종사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패전 후 경제공황으로 인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져 이를 단념했다. 대신 그는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비첸하우젠으로 돌아왔다. 그 후 [[포메른]]에서 농장 조수로 무보수로 일하다가 그곳에서 독일병사의 치료를 관찰했을 때 훗날 저작에 영향을 미쳤다. [[1922년]]에 다레는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할레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가축의 사육을 전공하여 농학 학위를 취득했다. == 아르타마넨 == [[1929년]]에 박사연구를 마친 그는 동프로이센과 핀란드에서 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독일청년으로서 조국의 회복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토지회복에 열중인 청년단체인 <아르타마넨>에 가입했다. 다레가 <북방인종의 장래는 땅에서 결정된다>라는 관념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배경도 있어 이것을 피와 땅(Blut und Boden)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는 곧 피, 인종 및 혈통을 표현하며 은 땅, 영역, 혹은 토지로 해석한다. 이 이론의 본질은 점령되어 경작되어진 토지와 인간과 사이에 장기간에 걸쳐 벌어지는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1926년]]에 발표된 다레의 첫 정치적 논문은 식민지화에 관한 것으로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기를 포기한 독일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첫 저서인 <북방인종 생명의 원천인 농민>은 [[1928년]]에 쓰여졌다. 그는 삼림보호를 크게 강조하여 자연스런 토지관리 방법을 주창하며 가축을 사육함에는 개방적인 공간과 공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크게 감명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이 [[하인리히 힘러]]였다. 힘러 자신도 <아르타마넨>의 멤버였다. 다레는 독일농민을 <독일국민의 문화적 인종적 중핵을 형성하고 북구인의 선조를 지닌 균질적인 인종집단>이라 정의했다. 북구인의 출생률은 다른 인종보다 낮았기에 북구인은 오랫동안 절멸의 위협에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 [[나치당]] 활동 == 다레는 열렬한 나치당원이어서 농민을 나치에 가입시키기 위해 [[1930년]] 여름에 농업에 관한 정치적인 조직을 설립했다. 그는 이 조직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즉 도시정부에 대한 무기로서 전원지역의 농민의 불안을 틈타 나치에 충실한 후원자로서 농민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것과 장래 동구권 정복지에서 슬라브인을 대신해 이민할 농민에게 대해 선거권을 주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리하여 그는 농촌을 국가사회주의의 기틀아래 넣는데 성공했다. == 식량장관 == 나치가 정권을 획득한 후에 다레는 식량장관, 인종이주국 장관, 전국 농민지도자 등에 취임하여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일했다. 그는 소규모 단위의 농장이 분할되는 것을 막기위해 세습농지법의 제정을 추진했지만 이 법률은 지주와 소작농 간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다레는 친위대 인종 및 이주본부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인종과 영역>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여 <[[나의 투쟁(자서전)|나의 투쟁]]>에서 서술한 <동방으로의 충동>과 <생존권>을 대표하는 나치의 팽창주의적 정책에 이데올로기적인 배경을 부여했다. 다레는 [[1942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는데, 실제로는 강제수용소에서 배급을 줄이려고 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 전후 재판과 최후 == 그는 전후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식량농업 장관으로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50년]]에 석방된 그는 [[1953년]] [[9월 5일]]에 알콜의존증으로 인한 [[간암]]으로 [[뮌헨]]에서 사망했다. [[분류:1895년 출생]][[분류:1953년 사망]][[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제국군/군인]][[분류:나치당원]][[분류:슈투름압타일룽/인물]][[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간암으로 죽은 인물]][[분류: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