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jpg]] == 개요 ==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는 유럽 연합 건설을 주도한 오스트리아-일본인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 생애 == 코우덴호페칼레르기는 1894년 11월 16일에 도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외교관 하인리히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빈으로 돌아온 이후, 1917년에 빈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평화주의적인 범유럽적 정치기구를 건설하기 위해 외교/언론 업무에 전념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을 딴다. 1922년에 단 28세의 나이로 빈 신자유일보 (Neue Freie Presse)에 유럽 정치인들의 이목을 끄는 "유럽 문제에 관하여"라는 기사를 기고하고, 이듬해에 프랑스와 독일의 철강/석탄 산업의 협력을 제안하는 "범유럽"(Paneuropa)라는 책을 출판한다. 코우덴호페칼레르기는 1924년에 동명의 신문사를 창간하고, 1926년에 최초의 범유럽 회의를 열고,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유럽 기구의 국가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코우덴호페칼레르기는 스위스로, 그 뒤 프랑스와 미국으로 망명하고, 프랑스 국적을 획득한 이후 뉴욕대 교수로 임명된다. 2차세계대전 이후 스위스로 회귀하고, 1947년부터 헤이그에서 [[윈스턴 처칠]]과 함께 [[유럽 평의회]]의 초석이 되는 유럽 회의를 개최한다. 1952년에 국제유럽운동의 명예총장으로 임명된다. 1972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한다. == 여담 == 1950년에 유럽 건설에 공헌한 인물들을 위한 카롤루스 대제상의 최초 수상자가 되었다. [[노벨 평화상]] 후보 명단에 54번 올랐지만 수여하지 못했다. [[분류:오스트리아의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