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마니우스 마닐리우스''' }}}[br]{{{-1 [[라틴어]]: Manius Manili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조부)[br]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아버지)[br]만니우스 마닐리우스(형제?)[br][[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조카?)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49년 || ||<#800080> {{{#ffffff '''전임''' }}}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기원전 150년 집정관)|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br][[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기원전 150년 집정관)|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기원전 149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그누스]][br][[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148년 집정관)|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고위 행정관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플레브스]] 가문인 마닐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푸블리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67년 일리리아에서 총독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 휘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를 맡아 일리리아 국왕 [[겐티오스]]를 사로잡는 데 일조한 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가 그의 형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기원전 155년 또는 154년에 [[법무관]]을 역임했다. [[아피아노스]]는 히스파니아 속주에 그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군림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가까운 히스파니아와 먼 히스파니아 속주 중 어디에 부임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마닐리우스와 카이소니누스는 루시타니아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했지만, 뒤이은 전투에서 [[재무관]] 바로를 포함한 6,000명의 병사가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마닐리우스는 곧 로마로 돌아갔고, [[원로원]]은 이에 대응해 [[루시타니아 전쟁]]을 단행했다. 그는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149년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기원전 149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로마 공화국과 [[고대 카르타고]]간의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원로원]]은 두 집정관에게 아프리카로 진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육군을 맡았고, 켄소리누스는 해군을 이끌었다. 유티카에 상륙한 두 집정관은 평화 협상을 하기 위해 찾아온 카르타고 사절단에게 모든 무기와 인질 300명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카르타고인들이 순순히 따르자, 두 집정관은 그들에게 바다에서 10마일 이상 떨어진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새 도시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는 자신들을 파멸시키려는 수작이라 여기고 단호히 거부하고, 방어 준비를 시작했다. 두 집정관은 카르타고인들이 모든 무기를 반납한 이상 별다른 저항을 못하리라 여기고 별다른 경계 없이 카르타고로 진군했다가 격파되었다. 이후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포위했지만, 이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패배한 데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기원전 148년 여름 켄소리누스는 로마로 돌아갔지만, 그는 아프리카에 남아서 카르타고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재차 벌였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일부 학자들은 [[폴리비오스]]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마닐리우스와 켄소리누스를 무능하기 짝이 없는 지휘관으로 매도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지만, 두 집정관이 카르타고를 상대로 고전한 것은 분명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33년 농지법 개혁을 단행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에 반대한 전임 집정관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이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20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마닐리우스]]가 그의 조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웅변가에 대하여>에서 마닐리우스가 당대에 가장 저명한 법학자 중 한 명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