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br]{{{-1 [[라틴어]]: Manius Aquilli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마니우스 아퀼리우스(기원전 101년 집정관)|마니우스 아퀼리우스]](아들)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29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페르페르나(기원전 130년 집정관)|마르쿠스 페르페르나]][br][[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130년 집정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기원전 129년 집정관)|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128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br][[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 루푸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기원전 487년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투스쿠스를 배출한 이래 여러 차례 고위 행정관을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아퀼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러나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그의 조부와 아버지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그가 기원전 132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29년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기원전 129년 집정관)|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제비 뽑기 결과 소아시아에 임지를 부여받은 그는 [[아리스토니코스]]의 반란 사건 여파로 혼란스러웠던 [[페르가몬]]으로 향했다. 당시엔 전임 집정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기원전 130년 집정관)|마르쿠스 페르페르나]]가 아리스토니코스를 격파하고 생포해 로마로 압송했지만, 기원전 129년 초 갑작스런 병환으로 사망해버렸고 페르가몬 각지에서는 여전히 반 로마 봉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페르가몬에 도착한 뒤 일부 도시를 포위했다. 이때 도시들에 물을 공급하는 샘을 오염시켜서 주민들이 고통받게 해 항복을 유도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26년까지 총독의 권한으로 페르가몬에 머물면서 새로운 아시아 속주를 조직하고 국경을 정했다. 그는 10명의 사절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와함께 트라키아와 케르소네소스에 있던 옛 페르가몬 왕국의 영역을 마케도니아 속주로, 안드로스와 아이기나를 아이가나 속주로 편입했다. 여기에 반란 진압에 큰 도움을 줬던 [[카파도키아 왕국]]에 리카오니아를, [[폰토스 왕국]]과 [[비티니아 왕국]]에 프리기아를 분할해서 나눠줬다. [[아피아노스]]는 프리기아 분할 과정에서 [[미트리다테스 5세(폰토스)|미트리다테스 5세]]에게 뇌물을 받고 그에게 더 많은 영토를 떼줬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기원저 126년 말에 로마로 돌아온 그는 그 해 11월 11일에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아리스토니코스가 전리품으로 취급되었고, 개선식이 끝난 직후 처형되었다. 기원전 125년 또는 124년, 아시아 속주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62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에게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123년 [[호민관]]에 취임한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아퀼리우스가 분명 범죄를 저질렀으니 유죄를 선고받았어야 했는데, 당시 판사가 그로부터 뇌물을 받고 무죄를 선고했다고 비난하고, 원로원 의원이 판사를 맡은 관행을 깨고 [[에퀴테스]]를 판사에 대거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라쿠스는 아퀼리우스가 폰토스 국왕에게 뇌물을 받고 폰토스 왕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아시아 속주를 개편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라쿠스의 뜻대로 에퀴테스가 법원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그는 별다른 기소를 당하지 않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101년 집정관 [[마니우스 아퀼리우스(기원전 101년 집정관)|마니우스 아퀼리우스]]는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