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br]{{{-1 [[라틴어]]: Marcus Licinius Crass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조부)[br][[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54년 재무관)|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버지)[br]카이킬리아 메텔라(어머니)[br]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양자)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30년 || ||<#800080> {{{#ffffff '''전임''' }}}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기원전 31년 집정관)|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br][[옥타비아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옥타비아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옥타비아누스]][br][[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기원전 30년 집정관)|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평민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여 집정관직이 평민에게도 개방되는 데 크게 기여한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리키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당대 최고의 부자이자 정계의 거물로, [[술라의 내전]] 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고 집정관을 2차례 역임했으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했다가 [[카르헤 전투]]에서 패사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54년 재무관)|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54년 [[재무관]]을 맡아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 들어가 여러 임무를 수행했고,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의 지지자로서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을 역임했다. 어머니 카이킬리아 메텔라는 기원전 69년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의 딸이다. 기원전 43년 로마를 장악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그를 숙청 대상에 넣었는데, 아마도 크라수스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추적자들을 피해 시칠리아로 도주한 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휘하의 장군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협약이 체결되면서 사면되자 로마로 귀환했고, 안토니우스의 추종자가 되었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크레타와 키레네 총독을 맡았고 기원전 35년 비티니아 총독을 맡았다. 이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간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옥타비아누스의 편으로 넘어갔고, 기원전 31년 고위 사제 계급인 [[아우구르]](Augur)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가 몇 달 후 사임한 뒤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으로서 눈부신 군공을 세웠다. 다키아인들의 반란을 모조리 제압했고,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한 바스타르네 족과 격돌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 도중 바스타르네 족의 왕 델도(Deldo)와 결투를 벌인 끝에 처단하고 그의 갑옷을 탈취했다. 그 후 모이시아 대부분을 로먀의 영토로 귀속시켰고, 기원전 62년 마케도니아 총독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가 바스타르네 족에게 참패하면서 잃어버렸던 군기를 탈환했다. 이렇듯 눈부신 군공을 세운 그는 기원전 29년 군대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선언되었고, 기원전 27년 로마로 귀환한 뒤 [[스폴리아 오피마]]를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스폴리아 오티마는 전투에서 적군 지휘관과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이고 빼앗은 갑옷을 [[유피테르]] 신전에 바치는 의식으로, 그 이전에 이 의식을 수행한 인물은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건국자 [[로물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등 3명 뿐이었다. 당시 지중해 세게의 1인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스폴리아 오티마를 수행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져서 장차 자신의 경쟁자가 될 것을 우려했기에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근거로 거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모든 로마군의 [[임페리움]]을 쥐고 있으며 크라수스 역시 자신의 지휘하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니 그가 세운 공적은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근거를 댔다고 한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모든 총독들을 통제하고 군대를 지휘할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기원전 19년 원로원이 임페리음 프로콘술라리 마이우스(imperium proconsulare maius)를 수여했을 때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총독들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 수 있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국방 문제를 이유로 자신이 여러 속주를 별도로 통제할 권리를 인정받았지만, 마케도니아 속주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카시우스가 모든 장군이 황제의 지휘하에 놓인 것을 상식으로 여기는 당대의 사고관을 옥타비아누스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삼두의 일원으로서 크라수스의 요청을 기각했다고 추정한다. 삼두의 권한은 기원전 32년 1월 1일에 공식적으로 만료되었지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에 맞서 로마 세계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비상 권한을 5년 더 연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체제에서는 지휘관이 임페라토르로 선포되고 개선식을 행사할 권리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삼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무튼 크라수스는 스폴리아 오파마를 수행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 대신 [[개선식]]을 허락받았다. 그가 확보한 델도의 갑옷은 다른 전리품처럼 개선식 후 봉헌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숙청했다는 가설을 제기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숙청되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며 옥타비아누스의 은근한 견제를 받으며 일개 원로원 의원으로서 조용히 지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는 기원전 44년 법무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아들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를 양자로 삼았다. 프루기는 기원전 1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