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74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br]{{{-1 [[라틴어]]: Marcus Sempronius Tudita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74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조부)[br]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85년 || ||<#800080> {{{#ffffff '''전임''' }}}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186년 집정관)|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br][[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186년 집정관)|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800080> {{{#ffffff '''동기''' }}}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185년 집정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800080> {{{#ffffff '''후임''' }}}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184년 집정관)|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br][[루키우스 포르키우스 리키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가문인 셈프로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가이우스, 아버지는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40년 집정관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는 아버지로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를 두었기에 기원전 185년 집정관 마르쿠스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그러기에는 두 사람간의 집정관 선임 년도차가 너무 많다며 부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210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제2차 포에니 전쟁]]에 참여한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그의 아버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원전 204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는 그의 삼촌일 것이다. 기원전 193년 [[호민관]]을 맡아 로마 시민과 라틴 시민간의 금권 거래와 관련해 로마 시민과 라틴 시민 모두 동등하게 대우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189년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 지방을 통치한 뒤 이듬해 로마로 귀환했다. 기원전 185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185년 집정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리구리아에서 동료 집정관과 함께 군사 활동을 벌였다. 풀케르가 잉가우니 족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는 [[알프스 산맥]]에 거주하는 부족들과 전쟁을 벌였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피사에서 활동하면서 아펜니노 산 기슭의 적을 몰아붙여 섬멸했다고 한다. 기원전 184년 [[감찰관]]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감찰관 선거엔 그 외에도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기원전 189년 집정관)|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대 카토]],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기원전 194년 집정관)|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기원전 19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기원전 189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95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대 카토]],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가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스키피오 가문의 정적인 대 카토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이자, 카토의 정치적 동지인 플라쿠스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은 카토를 낙선시키기 위해 연합했다. 당시 카토는 매우 급진적인 정치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에, 상대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온건한 감찰관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카토는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도덕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선거 결과 카토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당선되었고, 그는 낙선했다. 기원전 183년 [[폰티펙스]]에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174년 로마에 창궐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