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br]{{{-1 [[라틴어]]: Marcus Iunius Sila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만리아누스(아버지)[br][[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들)||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09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기원전 110년 집정관)|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br][[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110년 집정관)|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 || ||<#800080> {{{#ffffff '''후임''' }}}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기원전 108년 집정관)|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br][[퀸투스 호르텐시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노빌레스]] 가문인 유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의 아버지가 기원전 165년 집정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의 아들이지만 입양을 통해 유니우스 실라누스 가문의 일원이 된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만리아누스로 추정한다. 이 인물은 기원전 141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나, 자신이 맡은 속주에 총독으로 부임했다가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된 뒤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친아버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화폐 연구자들은 '마르쿠스 실라누스'가 주조한 일련의 로마 동전을 토대로 그가 집정관을 맡기 전에 화폐 주조관을 맡았을 거라 추정한다. 또한 행정관의 취임 제한 연령을 규정한 빌리우스 아닐리스 법에 의거해 기원전 112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거라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법무관이나 총독으로서 가까운 히스파니아 또는 먼 히스파니아를 통치하며 일부 지역 부족과 맞붙었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109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메텔루스는 [[유구르타 전쟁]]을 수행하고자 누미디아로 향했고, 그는 킴브리족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던 갈리아 트란실파니아 속주로 향했다. 킴브리인들은 그에게 정착할 땅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를 거절하고 전투를 벌였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해 사방으로 도주했고 진영을 빼앗겼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패배했다는 것만 기술했다. [[에우트로피우스]]만이 실라누스가 승리했다고 기록했지만,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기원전 104년, 호민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96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로부터 킴브리족에게 패배해 로마의 자긍심에 상처를 준 혐의로 기소당했다. 하지만 그는 탄탄한 집안 배경에 힘입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아들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기원전 62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애인이었던 [[세르빌리아]]의 아내가 된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