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기원전 147년 출생]][[분류:기원전 49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br]{{{-1 [[라틴어]]: Marcus Perperna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기원전 147년 ~ 기원전 49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조부)[br][[마르쿠스 페르페르나(기원전 130년 집정관)|마르쿠스 페르페르나]](아버지)[br][[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92년 || ||<#800080> {{{#ffffff '''전임''' }}} ||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br][[마르쿠스 헤렌니우스]]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92년 집정관)|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91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br][[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1년 집정관)|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로마 공화국에서 기록상으로 가장 장수한 정치인이다. == 생애 == 페르페르나 씨족은 [[에트루리아]] 출신의 평민 씨족이다. 조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후, 아버지가 가문 최초로 로마 정계에 진출해 기원전 133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아 [[제1차 노예 전쟁]] 진압에 한 몫을 했고, 기원전 130년 집정관을 맡아 [[페르가몬]]에서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아리스토니코스]]를 진압했다. 그러나 로마로 돌아가서 [[개선식]]을 거행할 준비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망했고, 이후 조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가 불법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취득한 사실이 밝혀져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연좌제]]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무사히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기원전 95년 즈음에 [[법무관]]을 맡았고, [[재무관]] 시절 "로마인의 위대함을 모독한" 혐의로 고발당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기원전 91년 법무관)|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재판의 판사를 맡았다. 고발측 변호를 맡은 이는 아스콜리 시의 웅변가 티투스 베투키우스 바루스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를 "로마 밖에서 살았던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웅변가"라고 묘사했다. 이에 맞선 변호측 피고인은 당해 집정관이자 당대 로마 최고의 웅변가로 손꼽혔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다. 로마 최고의 웅변가와 이탈리아 최고의 웅변가의 대결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기원전 92년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계급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92년 집정관)|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지만 별다른 정치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동맹시 전쟁]]과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간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도 별다른 행적이 없다가 기원전 86년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91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이들이 실시한 인구 조사에서 동맹시 전쟁 중에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이탈리아인이 처음으로 로마 시민 명단에 포함되었다. 기원전 83년 술라가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술라의 내전]]을 단행했을 때, 그는 술라 편으로 넘어갔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실만 알려졌다. 기원전 76년경 가이우스 판니니우스 헤레이아와 함께 로마의 저명한 연극 배우인 퀸투스 로스키우스 갈루스를 5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빌리고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했지만 키케로가 피고인을 효과적으로 변호하는 바람에 패소했다. 기원전 54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 선처를 베풀 것을 법정에 호소해 무죄 선고가 내려지는 데 일조했다. [[대 플리니우스]]는 그가 [[카이사르의 내전]]이 막 발발했을 무렵인 기원전 49년에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가 죽었을 때 감찰관으로서 원로원 의원 목록에 포함시킨 사람들 중 7명만이 살아있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아들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78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뒤 히스파니아로 달아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에 가담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메텔루스 피우스]]를 상대로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치렀다. 그러다가 세르토리우스를 암살하고 그의 직위를 계승했으나 폼페이우스에게 패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성명 미상의 딸이 두 명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베스타]] 여사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