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4세기 집정관]][[분류:기병장관]] [include(틀:역대 로마 독재관 및 기병장관)]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4세기)] ||||<#800080> {{{#ffffff {{{+3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 }}}[br]{{{-1 [[라틴어]]: Marcus Foslius Flaccinator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조부)[br]가이우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318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br][[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레타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기원전 318년 집정관)|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 || ||<#800080> {{{#ffffff '''후임''' }}} ||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기원전 317년 집정관)|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br][[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기병장관]]. == 생애 == 기원전 433년 [[집정 무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의 프라이노멘은 마르쿠스이고 아버지의 프라이노멘은 가이우스라고 한다. 기원전 320년 [[독재관]] 가이우스 마이니우스의 [[기병장관]]으로 선임되었지만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318년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기원전 318년 집정관)|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 해에 [[삼니움]]과 로마간의 2년 휴전 협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314년 독재관 가이우스 마이니우스의 기병장관에 또다시 선임되었다. 마이니우스와 플라키나토르는 카푸아 귀족 오비우스와 노비우스 칼라비우스가 로마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조사를 막 시작했을 때 오비우스와 노비우스 칼라비우스가 자살했지만, 두 사람은 국가에 대한 음모를 뿌리 뽑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로마 엘리트의 부패를 조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이 마니이우스와 포슬리우스를 "지도층 사이에 분열을 일으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는 죄명으로 고발하자, 마이니우스와 플라키나토르는 직위를 사임한 뒤 민간인 신분으로 재판에 임했다. 귀족들은 그들을 강력하게 탄핵했지만, 배심원들은 두 사람의 당당한 태도에 감화되어 무죄를 선고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라키나토르는 기원전 313년 독재관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솔루스 휘하 기병장관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는 [[마르쿠스 포에텔리우스 리보]]가 기병장관을 맡았다고 밝혔다. 또한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가 독재관을 맡았다고 기술했다. 이렇듯 기록이 엇갈리기 때문에, 그가 기병장관을 맡은 게 맞는지, 정말 맡았다면 어느 독재관 휘하에서 맡았는지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