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기병장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독재관 및 기병장관)] ||||<#800080> {{{#ffffff {{{+3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br]{{{-1 [[라틴어]]: Marcus Fulvius Flacc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조부)[br]퀸투스 풀비우스(아버지)[br][[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장남)[br][[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차남)[br]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삼남)||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64년 || ||<#800080> {{{#ffffff '''전임'''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br][[루키우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 || ||<#800080> {{{#ffffff '''후임''' }}} ||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br][[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기원전 4세기에 투스쿨룸에서 로마로 이주한 뒤 로마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마르쿠스와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부 마르쿠스는 기원전 305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코르부스 파이티누스와 기원전 299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페티누스 중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기원전 305년 집정관이 그의 조부라면, 아버지는 기원전 296년 평민 [[조영관]]을 맡았던 퀸투스 풀비우스일 것이다. 그는 풀비우스 씨족으로서 '플라쿠스(Flaccus)'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한 첫번째 인물이다. 기원전 271/270년에 [[호민관]]을 맡은 그는 레지오에서 반란을 일으킨 로마 시민들을 채찍과 참수형으로 다스리는 것에 반발하며 "조상의 관습에 따라 채찍형과 사형을 로마 시민에게 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묵살하고 형벌을 가했다. 그 후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함께 '두 개의 강 연결 책임자(duoviri aquae perducendae)'로 선임되어 아니오 강에서 [[테베레강]]으로 연결하는 아니오 베투스 수로를 건설해 로마에 물을 공급하는 임무를 맡았다. 덴타투스는 임명된 지 5일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가 홀로 공사를 감독해야 했다. 기원전 264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카우덱스가 [[제1차 포에니 전쟁]]의 포문을 여는 동안, 그는 로마에 종속되지 않은 에트루리아의 마지막 도시 국가인 볼시니아와의 전쟁을 치렀다. 작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가 그보다 먼저 전쟁을 시작했지만 도시를 포위공격하던 중에 전사한 바 있었다. 그는 볼시니아를 공략하고 수비대 전원을 [[십자가형]]에 처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하고 수많은 조각상들을 로마로 가져왔다. 이후 볼시니인들이 섬겼던 계절과 정원 및 과일 나무의 신인 베르툼누스(Vertumnus) 숭배 의식이 로마 사회에 퍼졌다. 기원전 246년 [[독재관]]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휘하 [[기병장관]]으로 선임되어 집정관들을 대신해 행정관 선거를 실시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37년, 기원전 224년, 기원전 212년, 기원전 209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231년 [[감찰관]]을 맡았고 기원전 213년 기병장관, 기원전 210년 독재관에 선임되는 등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또한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의 동맹시였다가 [[한니발 바르카]]에게 돌아선 [[카푸아]]를 [[카푸아 공방전|공략하고 철저히 파괴했다.]] 차남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12년 법무관을 맡았으나 [[1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참패한 뒤 무능과 책임 회피 등을 이유로 고발당하자 해외로 망명했다가 기원전 209년 집정관을 맡은 형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으로서 로마에 귀환했다. 그리고 막내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맏형 퀸투스 휘하에서 레가투스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