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사르데냐 왕비]][[분류:사보이아 공작부인]][[분류:프랑스의 공주]][[분류:부르봉 가문]][[분류:사보이아 가문]][[분류:1759년 출생]][[분류:1802년 사망]][[분류:베르사유 출신 인물]][[분류:프랑스의 객사한 인물]] ||<-3>
'''사르데냐 왕국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의 왕비[br]{{{+1 마리 클로틸드}}}[br]Clotilde de France''' || ||<-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Madame_Clotilde_(1768-1769).jpg|width=100%]]}}} || ||<|2> '''이름''' || 프랑스어 ||마리 아델라이드 클로틸드 자비에르[br](Marie Adélaïde Clotilde Xavière)|| || 이탈리아어 ||마리아 아델라이데 클로틸데 사베리아[br](Maria Adelaide Clotilde Saveria)|| || '''출생''' ||<-2>[[1759년]] [[9월 23일]][br][[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사망''' ||<-2>[[1802년]] [[3월 7일]] (향년 42세)[br][[나폴리 왕국]] [[나폴리]]|| || '''장례식''' ||<-2>[[1802년]] [[3월 11일]][br][[나폴리 왕국]] 산타 카테리나 아 키아라 교회|| || '''배우자''' ||<-2>[[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1775년 결혼),,|| || '''아버지''' ||<-2>[[루이 페르디낭|프랑스의 도팽 루이]]|| || '''어머니''' ||<-2>[[작센 선제후국|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 '''형제''' ||<-2>마리 제피린, 루이, 그자비에,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엘리자베트]]|| || '''종교''' ||<-2>[[가톨릭]] {{{-2 (세례명:클로틸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왕족이자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의 왕후. [[루이 16세]]의 동생이다. == 생애 == [[루이 15세]]의 아들인 [[루이 페르디낭|루이 왕세자]]와 왕세자비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의 차녀로 태어났다. 궁중에서는 마담 클로틸드라고 불렸다. 아버지 루이 왕세자는 왕위를 물려받기 전 결핵으로 1765년 36세에 일찍 사망했고, 큰오빠인 [[루이 16세]]가 즉위함에 따라 왕의 여동생 신분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올케 언니가 된다. 1775년에 15살의 나이에 사르데냐 왕국의 왕세자인 피에몬테 공 카를로 에마누엘레와 정략결혼했다. 동생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엘리자베트]]와 무척 가까웠던 클로틸드는 동생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클로틸드는 자랄수록 살이 쪄서 뚱뚱한 마담이라는 뜻의 그로-마담(Gros-Madame)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녀가 결혼을 하게 되자 프랑스 궁중에서는 신랑이 2인분의 신부를 얻게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공주한테 막말을(...)-- 카를로 에마누엘레의 아버지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는 프랑스 공주를 며느리로 들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뚱뚱한 클로틸드를 보고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럼에도 남편 카를로 에마누엘레는 클로틸드를 사랑했으며,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클로틸드가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라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염려는 적중해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결혼 후 클로틸드의 이름은 마리아 클로틸데가 되었다. 사르데냐 왕국의 사람들은 보통 그녀를 클로틸데라고 불렸다. 클로틸드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였으며 유순하고 헌신적이었기에 궁중 사람들과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1793년에 클로틸드는 고향으로부터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오빠 루이 16세와 올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했다는 가슴아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1794년에는 가장 사랑하는 혈육이었던 엘리자베트가, 1795년에는 조카 [[루이 17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라왔다. 1789년에 오빠 [[샤를 10세|아르투아 백작]]이 사르데냐로 망명했으며 2년 뒤에는 고모 마리 아델라이드와 빅투아르 공주를 받아들였다. 타지에서의 궁중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고향으로부터 연달아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의 클로틸드는 이전 모습은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마른 상태였다고 한다. 1796년 10월에 남편이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로 즉위하면서 클로틸드는 사르데냐 왕국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798년 12월 6일에 [[프랑스 혁명 정부]]는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교전 끝에 왕국의 수도 [[토리노]]가 점령당하면서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부부는 [[나폴리]]로 피신했다. 1802년, 클로틸드는 나폴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내가 사망한 후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동생]]에게 양위했다. 사후 클로틸드는 가톨릭 교회의 인정을 받아 교황 [[비오 7세]]로부터 [[가경자]] 칭호를 받았다. == 가족관계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프랑스의 클로틸드[br]{{{-2 (Clotilde of France)}}} ||<|6> [[도팽 루이 페르디낭|프랑스의 왕세자 루이]][br]{{{-2 (Louis, Dauphin of France)}}} ||<|3> [[루이 15세]][br]{{{-2 (Louis XV of France)}}} || || [[프티 도팽 루이|부르고뉴 공작 루이]][br]{{{-2 (Louis, Duke of Burgundy)}}} || ||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br]{{{-2 (Marie Adélaïde of Savoy)}}} || ||<|3> [[마리아 레슈친스카|마리 레슈친스카]][br]{{{-2 (Marie Leszczyńska)}}} || ||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1세]][br]{{{-2 (Stanisław I)}}} || || 카타지나 오팔린스카[br]{{{-2 (Katarzyna Opalińska)}}} || ||<|7> [[작센 선제후국|작센]]의 마리아 요제파[br]{{{-2 (Maria Josepha of Saxony)}}} || ||<|3> [[아우구스트 3세]][br]{{{-2 (August III)}}} || || [[아우구스트 2세]][br]{{{-2 (August II)}}} || ||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br]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br]{{{-2 (Christiane Eberhardine[br]of Brandenburg-Bayreuth)}}} || ||<|3>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br]{{{-2 (Maria Josepha of Austria)}}} ||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br]{{{-2 (Joseph I)}}} || || [[빌헬미네 아말리|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br]빌헬미네 아말리]][br]{{{-2 (Wilhelmine Amalia[br]of Brunswick-Lünebu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