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 페르디난도 1세의 왕비[br]{{{+1 마리아 카롤리나 }}}[br]Maria Carolina von Österreich''' || ||<-3>{{{#!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Maria_Carolina_of_Austria.jpg|width=100%]]}}} || ||<|2> '''이름''' || 독일어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제 요제파 요하나 안토니아[br](Maria Carolina Luise Josepha Johanna Antonia)|| || 이탈리아어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사 주세파 조반나 안토니아[br](Maria Carolina Luisa Giuseppa Giovanna Antonia)|| || '''출생''' ||||[[1752년]] [[8월 13일]][br][[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오스트리아)|빈]] [[쇤브룬|쇤브룬 궁전]]|| || '''사망''' ||||[[1814년]] [[9월 8일]] (향년 62세)[br][[오스트리아 제국]] [[빈(오스트리아)|빈]] 헤첸도르프 궁전|| || '''배우자''' ||||[[페르디난도 1세]] ,,(1768년 결혼),,[* 페르디난도의 누나인 마리아 루이사(독일식으로는 마리아 루도비카, 카롤리나의 손위 시누이이자 올케언니이다.)는 카롤리나의 오빠 레오폴트 2세(남편 페르디난도의 매형이자 손위 처남.)와 결혼했으니 [[겹사돈]]이다.]|| || '''자녀'''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마리아 테레사]], 루이사 마리아, 카를로, 마리아 안나, [[프란체스코 1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말리에, 젠나로, 주세페, [[마리아 아말리아(양시칠리아)|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아 클로틸다, 마리아 엔리에타, 레오폴도, 알베르토, 마리아 이사벨라|| || '''아버지''' ||||[[프란츠 1세#s-1|프란츠 1세]]|| ||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오스트리아)|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오스트리아)|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요안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페르디난트, [[마리 앙투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 '''종교''' ||||[[가톨릭]]|| [목차] [clearfix] == 개요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10녀. 애칭은 샤를로트.[*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의 샤를로트를 마리아 카롤리나의 애칭에서 따왔다고 한다.] == 생애 == === 어린 시절 === 이름인 마리아 카롤리나는 요절한 언니들인 3녀[* 1740~1741.]와 7녀[* 1748년에 출생 직후 사망.]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낳은 11명의 딸 중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딸로 평가된다. 실제로 여장부같이 활달하고 강인한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3살 차이 나는 바로 아래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친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남편 [[루이 16세]]와 함께 폐위당한 후에도 계속 서신 왕래를 했다고 한다. 나중에 조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카롤리나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어머니]]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모를 가장 사랑하셨어요"라고 언급했을 정도. === 동생과 뒤바뀐 운명 === 사실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야 할 사람'''은 동생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닌 마리아 카롤리나였다.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일찍이 [[루이 16세|프랑스 왕태자]]와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마리아 카롤리나의 바로 위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요제파가 결혼했어야 할 나폴리-시칠리아 국왕과 카롤리나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바로 위의 언니가 죽어서 결혼 순서가 차례로 한 줄씩 당겨진 것이다. 카롤리나는 죽은 요제파 대신 나폴리로 시집가서 많은 자식들을 낳아 대가족을 거느리고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를 잃을 때까지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만약''' 이렇게나 유능했던 카롤리나가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시 [[앙시앵 레짐|프랑스의 사회상]] 등을 고려하면 혁명은 필연적이었을지도.] === 결혼 생활 === || [[파일:Maria Carolina, Queen of Naples and Sicily.jpg|width=100%]] || 그녀는 남편인 [[페르디난도 1세|페르디난도]]를 보고 그가 '매우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페르디난도 또한 첫날 밤 이후 자신의 아내가 돼지처럼 땀을 많이 흘리고 죽은 듯이 잔다고 불평했다. 다소 안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두 부부는 총 18명의 자녀를 두게 되는데, 여장부같은 그녀와 무능하고 남에게 의존적인 페르디난도의 성격이 꽤나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페르디난도는 사냥과 낚시를 즐겼지만 정치에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런 남편과 달리 그녀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랬듯이, 남편과 권력을 보필하기만 하는 꽃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 달리 최고의 교육을 받은데다 ~~어머니를 닮아~~ 야심도 강했다. === 정치적 활동 === 불과 만 15세에 [[나폴리]]에 도착한 마리아 카롤리나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정치적 권력을 손에 얻고자 했다. 당시 나폴리는 친 [[스페인]]계의 총신인 베르나르도 타누치 후작이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는데,[* 1759년부터 1767년까지 국왕의 섭정을 맡기도 했다.] 그는 페르디난도의 아버지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가 직접 임명한 대신이었다. 마리아 카롤리나가 처음 한 일은 그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세력이 없었지만 약 10년 동안 남편의 신뢰를 얻고, 후계자를 낳은 이후에 강화된 입지를 바탕으로 1776년 타누치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마리아 카롤리나는 실질적인 나폴리-시칠리아의 지배자로 군림했고 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오스트리아 외교 정책을 수립했다.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이 [[프랑스 왕국|프랑스]]계임에도 수백 년의 철천지 원수인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와 친했던 이유는 당연히 오스트리아가 자신의 친정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전형적인 계몽 군주로서 봉건적이고 낙후된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을 서유럽 열강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자 했다. 그녀는 해군을 증설하고 상업을 개혁하였으며, 영국과 스페인과의 동맹을 갱신하는 등 전면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개혁 자체는 성공적이었고 나폴리의 내정이 튼실해졌지만, 여러 급진적인 정책으로 인해 귀족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왕비였다. 이후 [[프랑스 혁명]]기에는 처음으로 프랑스를 적대시했는데, 가장 친했던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과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애([[마리 앙투아네트]])를 살릴 수 있다면...'이라는 얘기를 했을 정도라고. [[마리 앙투아네트|사랑하는 동생]]이 프랑스의 왕비로 복위될 수 없다면 수녀원에 들어가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고 하나 그마저도 이뤄지지 못했으니 매우 한스러웠던 듯하다.] 그녀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열렬한 반대자였으나 대 프랑스 전쟁에서 패한 이후 나폴리 왕위를 잃고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로 넘어가 망명 정부를 세웠다. 1802년 잠시 왕정이 복고되어 나폴리로 돌아왔지만, 1806년에 다시 나폴레옹이 나폴리를 침략하고 이번에는 시칠리아까지 점령당하면서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해야 했다. 여담으로 나폴레옹은 마리아 카롤리나를 보고 "[[나폴리 왕국]] 안에 남자라고는 저 왕비밖에 없다"라는 평을 했다. 나폴리 사람들에 대한 조롱에 더 가까운 발언이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은 마리아 카롤리나의 조카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을 한 바 있다. 부르봉 왕가 복고 시기에 그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향하자 왕실 사람들이 죄다 겁을 먹고 도망쳤는데, 마리 테레즈만이 항전을 주장하며 버티다 결국 아랫 사람들의 설득에 고집을 꺾었다. 이 때도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에 사내라곤 저 여자(마리 테레즈)뿐"이라 했다고.] 이 일을 두고 마리아 카롤리나는 나폴리에 왕정이 복고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814년 62세의 나이로 [[빈(오스트리아)|빈]]에서 사망했다. 이후 [[양시칠리아 왕국]]이 출범하면서 남편 페르디난도도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로 즉위하였지만, 마리아 카롤리나는 양시칠리아 왕국 출범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양시칠리아 왕비의 칭호를 받지는 못했다. 때문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첫 왕비 자리는 마리아 카롤리나의 며느리인 [[마리아 이사벨]]([[프란체스코 1세]]의 왕비)이 갖게 되었다. === 프랑스 혁명 이후 === 합스부르크 가문에서조차 [[마리 앙투아네트]]를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카롤리나는 여동생이 '죽음의 집'이라 불린 콩시에르쥬리에 수감되기 직전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당대의 외교 표준 언어이자 전 유럽 궁중의 언어는 [[프랑스어]]였는데[*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친인 [[프란츠 1세]]는 [[프랑스어]]권에서 장가 와서 일평생 [[독일어]]를 배우지 않고 프랑스어만 쓰고 살았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나라에 시집가거나 심지어 왕위를 계승하러 가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이 덕분이었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소식을 들은 후로는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프랑스인]]들을 증오해 프랑스어를 쓰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어는 지금의 영어와 같이 세계적인 공용어였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 제1제국|프랑스]]에 의해 [[나폴리 왕국]]을 빼앗긴 데다 딸마저 원수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 필리프|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3세]][*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으로 [[부르봉 가문]]의 방계인 [[7월 왕정|오를레앙 가문]] 출신이다. 부친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2세는 부르봉 왕조의 가까운 친척이었으나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을 베는 데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정작 본인도 혁명 정부 당시 쿠데타에 연루되어 똑같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와 연애 결혼하는 걸 보아야 했다. ~~하지만 루이필리프와 [[마리아 아말리아(양시칠리아)|마리아 아말리아]]의 후손들이 제법 번성한 것을 보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루이필리프와 마리아 아말리아는 무려 6남 4녀를 두었는데, 요절한 3녀, 4남을 제외해도 5남 3녀가 성인으로 성장했다. 또한 루이필리프의 후계자들도 대부분 자녀를 여럿 두어 왕족의 배우자를 다수 배출하였고, 때문에 루이필리프의 후손들 중에는 현직 군주도 3명이나 있는 등([[펠리페 6세]], [[필리프(벨기에)|필리프]], [[앙리(룩셈부르크)|앙리]]) 루이필리프의 후손들은 상당히 번성한 편이다.] == 가족관계 ==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br]{{{-2 (Archduchess Maria Carolina of Austria)}}} ||<|6> [[프란츠 1세]][br]{{{-2 (Francis I)}}} ||<|3> [[로렌 공국|로렌]] 공작 레오폴드[br]{{{-2 (Leopold, Duke of Lorraine)}}} || || [[로렌 공국|로렌]] 공작 샤를 5세[br]{{{-2 (Charles V, Duke of Lorraine)}}} || ||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br]{{{-2 (Eleonore of Austria)}}} || ||<|3>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br]{{{-2 (Élisabeth Charlotte of Orléans)}}} || ||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br]{{{-2 (Philippe I, Duke of Orléans)}}} || || [[엘리자베트 샤를로테|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br]{{{-2 (Elis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 ||<|7> [[마리아 테레지아]][br]{{{-2 (Maria Theresa)}}} || ||<|3> [[카를 6세]][br]{{{-2 (Charles VI)}}} || || [[레오폴트 1세]][br]{{{-2 (Leopold I)}}} || || [[엘레오노레 막달레네|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br]{{{-2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 ||<|3>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br]{{{-2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br]{{{-2 (Ludwig Rudolf,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 ||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br]{{{-2 (Christine Louise of Oettingen-Oettingen)}}} || === 자녀 === [[파일:Painting_of_the_family_of_Ferdinando_IV_(Angelica_Kauffmann,_1782) .jpg]] 남편 페르디난도와의 사이에서 1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 중 11명이 요절했고 7명만이 살아남았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무려 1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마리아 카롤리나는 그보다 2명이나 더 낳았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품뿐만 아니라 생산 능력까지 닮았다는 평가가 있으나 애석하게도 자녀들이 장성하는 확률은 높지 못했던 셈. ~~그래도 1700년대 후반에 18명 중에서 7명이 살아남은 거면 꽤 많이 살아남은 건데~~ [[마리아 테레지아]]가 낳은 5남 11녀 중에서는 4명을 제외한 12명이 장성했다. 물론 이는 당시에 천연두 등으로 높았던 영유아 사망률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카롤리나는 자신의 자녀들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과 혼인시키는 등, 친정과 지속적인 교류를 맺었다. 딸들의 이름을 상당히 규칙적으로 지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올케인 마리아 루이사의 이름을 따 지은 후에 다음 딸들에게는 자매들의 이름을 태어난 순서대로 붙였다. *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마리아 테레사]] -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의 셋째 오빠인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장남 [[프란츠 2세]]와 결혼했다. 마리아 테레사 본인은 활달한 성품의 소유자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지만, 마리아 테레사의 자녀들은 12명의 자녀중 7명만이 살아남았고 마리아 테레사가 죽은 후 [[프란츠 2세]]는 곧바로 재혼했다. 거기다 마리아 테레사와 프란츠 2세의 장녀 [[마리 루이즈|마리아 루도비카]]는 외할머니 마리아 카롤리나의 원수 중 하나인 [[나폴레옹 1세]]와 결혼했다. 다만 연애결혼이 아니라 정략결혼이었다. 나폴레옹을 천하의 개쌍놈 취급하던 카롤리나는 오히려 나폴레옹의 몰락 때 외손녀에게 “너의 남편 나폴레옹을 선택하라”고 충고했다. 나폴레옹도 싫지만 주변에 휘둘려대는 사위가 더 꼴 보기 싫었기 때문(...) * 루이사 마리아 - 마리아 카롤리나의 차녀, 형부 겸 사촌오빠 [[프란츠 2세]]의 남동생인 [[토스카나 대공국|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11년 만인 1801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남편이 토스카나 대공위를 상실하면서 오스트리아로 망명해야 했고, 이듬해인 1802년 [[빈(오스트리아)|빈]]에서 막내아들을 사산하고 사망했다. 사산된 아들까지 포함해서 총 3남 3녀를 두었지만 1남 2녀만이 살아남았는데[* 여담으로, 루이사 마리아의 아들이자 페르디난도 3세의 후계자인 레오폴도 2세는 또 다시 루이사 마리아의 조카(남동생 [[프란체스코 1세]]의 4녀)인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와 결혼했다.], 그 중 차녀 마리아 테레사는 사르데냐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왕비가 되어 뒷날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낳았다. * [[프란체스코 1세]] - 마리아 카롤리나의 차남. 그 또한 [[레오폴트 2세]]의 딸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여대공과 결혼한다. 마리아 클레멘티나가 딸 1명만 남긴 채 결핵으로 사망한 뒤에는 스페인 공주 마리아 이사벨[* 프란체스코의 큰아버지인 [[카를로스 4세]]의 4녀, 사촌지간이다. 프란체스코의 전처 마리아 클레멘티나와도 사촌간이다.]과 재혼했다. 1825년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한다. * [[마리아 아말리아(양시칠리아)|마리아 아말리아]](프랑스의 마리 아멜리) - [[루이 필리프 1세]]와 당시로서는 드문 연애결혼을 했다. 원래 마리아 아말리아는 [[루이 17세]]의 형 루이 조제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남. 마리아 아말리아와는 이종사촌.]와 혼담이 오가는 사이였으나 그는 요절했고 이후 루이 필리프와 만나 사랑에 빠젔다. 당연히 마리아 카롤리나는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가장 앞선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 2세]]의 아들인 루이 필리프와 자신의 딸이 결혼하는데 반대했다. 하지만 루이 필리프에게 네 애비에 대해 아는 대로 불라는 압박 면접까지 치른 끝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다.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녀''' ||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리아 테레사]][br]{{{-2 (Maria Theresa, Holy Roman Empress)}}} || [[1772년]] [[6월 6일]] || [[1807년]] [[4월 13일]] || [[프란츠 2세]][br]슬하 4남 8녀[* [[마리 루이즈|프랑스의 황후 마리 루이즈]], [[페르디난트 1세#s-2|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레오폴디네|브라질의 황후이자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레오폴디나]] 등] || || '''2녀''' || 토스카나 대공비 루이사 마리아[br]{{{-2 (Luisa Maria, Grand Duchess of Tuscany)}}} || [[1773년]] [[7월 27일]] || [[1802년]] [[9월 19일]] ||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 [[레오폴트 2세]]의 차남(동시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친손자)이자 [[카를로스 3세]]의 외손자(어머니 마리아 루도비카가 카를로스 3세의 딸)이다. 아내는 반대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손녀이자 카를로스 3세의 친손자이니 부부가 쌍방으로 고종사촌이자 외사촌.][br]슬하 1남 2녀[* 레오폴도 2세,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카를로 알베르토]]의 왕비이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어머니)등] || || '''1남''' ||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왕자[br]{{{-2 (Prince Carlo, Duke of Calabria)}}} || [[1775년]] [[1월 4일]] || [[1778년]] [[12월 17일]] || || || '''3녀''' || 마리아 안나 공주[br]{{{-2 (Princess Maria Anna)}}} || [[1775년]] [[11월 23일]] || [[1780년]] [[2월 22일]] || || ||<|2> '''2남''' ||<|2> [[프란체스코 1세]][br]{{{-2 (Francis I)}}} ||<|2> [[1777년]] [[8월 19일]] ||<|2> [[1830년]] [[11월 8일]]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클레멘티나[* [[레오폴트 2세]]의 3녀이자 [[카를로스 3세]]의 외손녀이다.][br]슬하 1녀 || ||<#F0F8FF> [[마리아 이사벨|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카를로스 4세]]의 4녀이다.][br]슬하 6남 6녀[* [[마리아 크리스티나(양시칠리아)|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페르디난도 2세]], [[테레사 크리스티나|브라질의 황후 테레사 크리스티나]] 등] || || '''4녀''' || 사르데냐 왕국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br]{{{-2 (Maria Cristina, Queen of Sardinia)}}} || [[1779년]] [[1월 17일]] || [[1849년]] [[3월 11일]] || [[카를로 펠리체]] || || '''3남''' || 젠나로 왕자[br]{{{-2 (Prince Gennaro)}}} || [[1780년]] [[4월 12일]] || [[1789년]] [[1월 1일]] || || || '''4남''' || 주세페 왕자[br]{{{-2 (Prince Giuseppe)}}} || [[1781년]] [[6월 18일]] || [[1783년]] [[2월 19일]] || || || '''5녀''' || [[마리아 아말리아(양시칠리아)|프랑스 왕비 마리 아멜리]][br]{{{-2 (Maria Amalia, Queen of the French)}}} || [[1782년]] [[4월 26일]] || [[1866년]] [[3월 24일]] || [[루이필리프]][br]슬하 6남 4녀[* [[오를레앙의 루이즈|벨기에의 왕비 루이즈]], [[클레망틴 도를레앙|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비 클레망틴]] 등] || || '''6녀''' || [[아스투리아스]] 공비 마리아 안토니아[br]{{{-2 (Maria Antonia, Princess of Asturias)}}} || [[1784년]] [[12월 14일]] || [[1806년]] [[5월 21일]] || [[페르난도 7세]] || || '''7녀''' || 마리아 클로틸다 공주[br]{{{-2 (Princess Maria Clotilde)}}} || [[1786년]] [[2월 18일]] || [[1792년]] [[9월 10일]] || || || '''8녀''' || 마리아 엔리케타 공주[br]{{{-2 (Princess Maria Enrichetta)}}} || [[1787년]] [[7월 31일]] || [[1792년]] [[9월 20일]] || || || '''5남''' || [[살레르노]] 공 레오폴도[br]{{{-2 (Leopold, Prince of Salerno)}}} || [[1790년]] [[7월 2일]] || [[1851년]] [[3월 10일]] || 오스트리아의 클레멘티나 여대공[* [[프란츠 2세]]의 6녀이자 페르디난도 1세의 외손녀이다.][br]슬하 1녀 || || '''6남''' || 알베르토 왕자[br]{{{-2 (Prince Alberto)}}} || [[1792년]] [[5월 2일]] || [[1798년]] [[12월 25일]] || || || '''9녀''' || 마리아 이사벨라 공주[br]{{{-2 (Princess Maria Isabella)}}} || [[1793년]] [[12월 2일]] || [[1801년]] [[4월 23일]] || || [[분류:나폴리 왕비]][[분류:시칠리아 왕비]][[분류:오스트리아의 공주]][[분류:왕자비]][[분류: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분류: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 [[분류:1752년 출생]] [[분류:1814년 사망]][[분류:빈 출신 인물]][[분류:카푸친 교회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