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아스투리아스 국왕)] ||<-3><:>[[파일:마우레가투.png|width=100%]]|| ||<-3><:>{{{+1 '''Mauregato de Asturias''' }}}|| ||<-2> '''가문''' ||<(> 아스투리아스 왕조 || ||<-2> '''생몰년도''' ||<(> 미상 ~ [[789년]] || ||<-2> '''출생지''' ||<(> [[아스투리아스 왕국]] || ||<-2> '''사망지''' ||<(> [[아스투리아스 왕국]] 프라비아 || || '''재위'''[br]'''기간''' || '''[[아스투리아스 왕국]] 국왕''' ||783년 - 789년 || ||<-2> '''아버지''' ||<(> [[알폰수 1세]] || ||<-2> '''어머니''' ||<(> 시살다 || ||<-2> '''배우자''' ||<(> 크레우사 || ||<-2> '''자녀''' ||<(> 헤르메네길두 || [목차] [clearfix] == 개요 == [[아스투리아스 왕국]] 7대 국왕. == 생애 == 아스투리아스 왕국 3대 국왕 [[알폰수 1세]]와 무슬림 노예 출신인 시살다 사이의 [[사생아]]다. 783년 [[실루]] 왕이 사망했을 때, 아도신다 왕비는 [[프루엘라 1세]]의 아들 [[알폰수 2세|알폰수]]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알폰수 왕자가 프루엘라 1세를 살해했던 자신들을 가만둘 리 없다고 여긴 귀족들은 마우레가투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알폰수는 알라바로 망명했고, 아도신다 왕비는 성 사도 요한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마우레가투는 [[후우마이야 왕조]]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100명의 처녀를 코르도바에 보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전승의 신빙성은 거의 없다고 간주하지만, 그의 시대에 무슬림과의 전쟁이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한편, 그의 치세에 툴레도 대주교 엘리판두스(Elipandus)와 우르헬 주교 펠릭스가 "[[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가졌고, 하느님이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를 아들로 입양했다"라는 내용의 양자설(Adoptionism)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칸타브리아 출신의 수도자인 리에바나의 성 베아투스는 이를 [[이단/기독교|이단]]이라고 규탄했고, [[카롤루스 대제]] 역시 양자설을 규탄하는 성명을 반포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크레우사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아들 헤르메네길두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789년 마우레가투가 사망했을 때, 귀족들은 그의 아들 대신 전왕 [[아우렐리우]]의 형제이자 칸타브리아 공작 프루엘라의 아들인 [[베르무두 1세]]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분류:아스투리아스 국왕]][[분류:78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