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독일의 남작]] [[분류:독일제국군/군인]] [[분류:독일 국방군 원수]]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 [[분류:1881년 출생]] [[분류:1954년 사망]][[분류:작센안할트 주 출신 인물]][[분류:독일의 실향민]] [include(틀:독일 국방군/원수)] |||| '''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br]{{{+2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br] '''[[독일 국방군/원수|{{{#fff FM}}}]] Maximilian von Weichs'''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vignette3.wikia.nocookie.net/Maximilian_von_Weichs.jpg|width=100%]]}}} |||| ||<:>'''이름''' ||<(> '''Maximilian Maria Joseph Karl Gabriel Lamoral Reichsfreiherr von Weichs zu Glon'''[br] 막시밀리안 마리아 요제프 카를 가브리엘 라모랄 폰 바이흐스[* 본 항목에서는 '바익스'라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발음은 '바이흐스'에 가깝다.] 추 글론 국가남작[*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바이흐스 추글론'이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 ||<|2><:>'''출생''' ||<(> [[1881년]] [[11월 12일]] || ||[[안할트 공국]] [[데사우]][* 現 [[독일]] [[작센안할트]] 주 [[데사우로슬라우]]] || ||<|2><:>'''사망''' ||<(> [[1954년]] [[9월 27일]] (향년 73세) || ||[[서독]] [[본(독일)|본]] 근교 레스베르크 || ||<:>'''복무''' ||<(> [[바이에른 왕국군]] (1900년 ~ 1918년)[br][[바이마르 공화국#s-7|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3년)[br][[독일 국방군]] (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 [[원수(계급)|원수]] (Generalfieldmarschall) ||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폴란드 침공]] [br] [[프랑스 침공]] [br] [[유고슬라비아 침공]] [br] [[바르바로사 작전]] [br] [[청색 작전]] [br] [[스탈린그라드 전투]] [br]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br] [[봄의 새싹 작전]]|| ||<:>'''주요 서훈'''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목차] [clearfix]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계급)|원수]]. [[독소전쟁]]에서 주로 활약했다. == 생애 == === 초기 이력 ~ [[전간기]] === 이름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귀족 출신이다. 1881년 11월 12일 [[안할트 공국]]의 수도 [[데사우]]에서 [[독일 제국군]]의 [[대령]]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 소재 빌헬름김나지움(Wilhelmsgymnasium)에 입학하고 [[1900년]]에 졸업해 [[바이에른 왕국군|바이에른 제2기병연대]]로 배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할 당시에 바익스는 [[대위]]였고 여단부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공으로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차 대전 종전 후에는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제3바이에른군단의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된 후 군축 과정에서도 요행히 살아남아 계속 복무할 수 있었다. || [[파일:external/ww2gravestone.com/image075_15.jpg]] || ||▲ 왼쪽부터 [[에르하르트 밀히]], [[빌헬름 카이텔]], [[발터 폰 브라우히치]], [[에리히 레더]], 바익스.[* 이 사진을 [[구글]]에 검색하면 "Jewish officers(유대인 출신 장교들)"이란 검색어가 뜬다. 다른 장군들은 유대인인가에 관해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에르하르트 밀히는 유대인이 아닌 것이 확실하게 밝혀진 인물인데, 자세한 내용은 [[에르하르트 밀히]] 항목 참조.] || [[1928년]] 2월에는 [[중령]]으로 진급, [[1930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1933년]]에는 [[준장|소장]]으로 진급한 후 [[1935년]]에는 기병사단장에서 개편된 제1기갑사단의 사단장으로 전속되었고 동시에 [[소장(계급)|중장]]으로 진급하였다. 기갑은 기병의 방계 후손격인 병과인 만큼 기갑 부대 운용 교리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던 전간기에는 기병 출신 장교들이 기갑 병과로 전속되는 일이 많았는데 바익스도 그런 테크트리를 탔다. 특히 귀족 혈통 출신인 데다 1차 대전기부터 기병에 몸 담아 왔던 바익스는 [[독일 국방군]] 내에서 신뢰를 얻고 있었는데 바익스의 기병 운용법은 베르너 폰 프리치 장군마저도 감탄하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35년 1월 10일에는 제 1기갑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다. [[1936년]]에는 기병[[중장|대장]]으로 진급하였고 [[1937년]]에는 제13군단장으로 취임한 뒤,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 합병]]과 [[뮌헨 협정|체코슬로바키아 합병]]에 군단 병력을 동원하여 성사시켰다. === [[제2차 세계대전]] === ==== [[폴란드 침공]] ~ [[유고슬라비아 침공]]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056-1643-29A%2C_Frankreich%2C_Gener%C3%A4le_v._Rundstedt%2C_v._Weichs.jpg|width=100%]] || ||▲ [[1940년]] 6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룬트슈테트]](左)와 함께. || 제13군단장이었던[* 당시 제13군단은 일명 "바익스 군단"이라고 불렸다.] 바익스는 [[폴란드 침공]] 당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휘하 남부집단군에서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의 제8군 휘하로 참전하여 [[바르샤바 전투(1939년)|바르샤바 공략전]]에 나섰다. [[1940년]]에는 [[프랑스 침공]] 당시 육군 총사령부 예비대의 제2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였고 7월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41년]] 4월에도 제2군 사령관으로서 바익스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전하였다. ==== [[독소전쟁]] ====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바익스는 [[페도어 폰 보크]] 휘하 중부집단군 소속 제2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였다. [[1942년]] 7월에 개시된 [[청색 작전]]으로 신설된 B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바익스는 B집단군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했으나 휘하 제6군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결국 무릎을 꿇음에 따라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2월에 [[원수(계급)|원수]]로 진급했다.(B집단군 휘하 6군 사령관이 원수인데 B집단군 사령관이 상급대장일 수는 없다.) 파울루스가 항복하던 날 히틀러가 격노하면서 "이제 독일군 어느 누구도 원수로 진급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걸 생각하면 다소 기묘하다. A집단군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도 원수로 진급했는데 후퇴에 성공한 공적으로 원수가 되었으니 독일군에게는 그다지 좋지 못한 징조였다. 이후 바익스의 B집단군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도 참전하였으나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무작정 틀어막으라는 히틀러의 무리한 지시가 내려오자 바익스는 후퇴를 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히틀러가 열받은 나머지 B집단군을 해체시킨 후, [[에리히 폰 만슈타인|만슈타인]]이 [[겨울폭풍 작전]] 당시 급조했던 부대인 "돈(Don) 집단군"과 합쳐서 새로운 남부집단군을 창설하게 한 후 만슈타인을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앉혔다. 이후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다시 편입된 바익스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탓에 강제로 군복을 벗게 되었으나 [[1943년]] 8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발칸 반도]]의 수비를 담당하는 F집단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1944년부터 유례없는 대공세를 펼쳐오며]] 위협을 가하자 바익스는 발칸 반도에 주둔한 자신의 부대와 독일 본토 사이가 분단될 것을 우려하고, 후퇴를 건의하여 히틀러의 허락을 받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에서 철군을 명했다. 다음해인 [[1945년]] 3월에는 또다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 전후 === [[파일:external/www.deutschlandradiokultur.de/b85bc04cffd9d6b398b94f26ef172ae6v2_max_512x384_b3535db83dc50e27c1bb1392364c95a2.jpg|width=500]]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이어진 [[뉘른베르크 인질 재판|인질 재판]]에 출두한 독일군 고위 장교들. 왼쪽부터 바익스, [[로타르 렌둘릭]](Lothar Rendulic) 상급대장,[* [[페르디난트 쇠르너]]에 이어 북부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Ernst_Dehner|에른스트 데너]](Ernst Dehner) 보병대장, [[https://en.wikipedia.org/wiki/Ernst_von_Leyser|에른스트 폰 라이저]](Ernst von Leyser) 보병대장. 바익스는 1945년 5월 2일, 바이에른 주의 에탈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발칸반도 점령 당시 전쟁 범죄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뉘른베르크 인질 재판]]에 기소되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불기소처분]]을 받고 풀려나 1954년에 [[본(독일)|본]] 근방에 위치한 뢰스베르크(Rösberg) 성에서 사망했다. == 진급 내역 == * 1902.03.09 - [[소위]](Leutnant) * 1911.03.03 - [[중위]](Oberleutnant) * 1914 - [[대위]](Hauptmann) * 1921.02.01 - [[소령]](Major) * 1928.02.01 - [[중령]](Oberstleutnant) * 1930.11.01 - [[대령]](Oberst) * 1933.04.01 - [[준장|소장]](Generalmajor) * 1935.04.01 - [[소장(계급)|중장]](Generalleutnant) * 1936.10.01 - 기병대장(General der Kavallerie) * 1940.07.01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3.02.01 - [[원수(계급)|원수]](Generalfeldmarschall) == 주요 서훈 내역 == * 1914.10.05 : 2급 철십자 훈장 * 1915.11.13 : 1급 철십자 훈장 * 1918.04.22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40.06.29 : 기사 철십자 훈장 * 1945.02.05 :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