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하띠엔 후국 후작)]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57 0%, #00008b 20%, #00008b 80%, #000057); color: #ece5b6" '''하띠엔 후국 2대 후작[br]{{{+1 琮德侯 | 종덕후}}}'''}}} || ||<|2> '''출생''' ||1700년 || ||캄보디아 왕국 융기(隆奇) [br] (現 [[캄보디아]] 백마성) || ||<|2> '''즉위''' ||1736년 || ||[[대월]] 광남국 하띠엔 [br] (現 [[베트남]] 하띠엔) || ||<|2> '''사망''' ||[[1780년]] [[11월 1일]] (향년 81세) || ||[[시암]] 톤부리 [br] (現 [[태국]] 방콕 톤부리현) || || '''능묘''' ||막티엔투묘(鄚天賜墓) || ||<|2> '''재위기간''' ||||'''{{{#ece5b6 하띠엔 군주}}}''' || ||1736년 ~ 1777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막(鄚) || || '''휘''' ||티엔 투 (hiên Tứ / 天賜 / 천사) || || '''부모''' ||부친 막구 [br] 모후 배씨름(裴氏廪) || || '''배우자''' ||효숙부인(孝肅夫人) 응우옌씨(阮氏) || || '''자녀''' ||6남 3녀 || || '''자''' ||사린(士麟) || || '''시호''' ||하선진흠차도독종덕후(河僊鎮欽差都督琮德侯) [br] 특진국노하선진도독종덕공(特進國老河僊鎮都督琮郡公) || || '''봉호''' ||색다친왕(索多親王)[* 시암이 봉한 작호.] || || '''신호[br](神號)''' ||다의지신(達義之神) || }}}}}}}}} || [목차] [clearfix] == 개요 == 鄚天賜 1700년 ~ 1780년 11월 1일 [[대월]]의 [[후 레 왕조]] 시기 [[응우옌씨 정권]]의 제후국 하띠엔 후국의 2대 군주로 부친이 중국인, 모후가 월남인인 혼혈이다. == 생애 == 1736년 아버지 막구(鄚玖)가 죽자 하띠엔 통치자로 즉위하였다. 재위 대부분 중화를 추구했으며 문묘를 짓고 선진적인 [[중원]] 학자를 초빙, 중국의 문화를 보급함과 동시에 시장을 활성화하여 하띠엔 근방의 여러 마을이 자연스럽게 탄생하였다. 그 결과 광남국을 캄보디아인,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참파인 등 여러 민족들이 거주하는 다민족 국가로 만들어 번성시켰다. 또한 불교를 크게 전파시켰고 재위 후반 [[천주교]]가 하띠엔에 유입되었으나 그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또한 부친 대부터 이어진 [[캄보디아]]와의 군신 관계를 청산했고 1747년 캄보디아 왕 우타이 2세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삭장, 다영 및 7개 성을 획득해 현재의 [[베트남]] 영토를 완성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이 시기 광남의 군주, 즉 막티엔투의 주군은 [[응우옌푹코앗]]과 황제 [[현종(레 27대)|현종]](顯宗)이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7성을 편입한 이 시기를 하띠엔 [[후국]](侯國) 및 광남국의 전성기로 구분한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이 [[버마]]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자 막티엔투는 아유타야 왕국의 후예 소최(昭最)를 받아들였다. 곧 [[딱신]]이 혼란스러운 태국을 정리하고 톤부리조를 개창하여 왕으로 즉위했는데 전조(前朝)의 왕족이 살아 있다는게 밝혀지면 자신의 정통성에 위협이 되기에 그를 받아들인 막티엔투에게 소최를 내놓으라고 했다. 이리하여 두 세력은 긴장 관계가 되었고 하띠엔의 선박이 침몰된 사건을 계기로 두 세력은 전시상황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후 오랫 동안 전쟁이 진행되자 하띠엔에서도 난이 두 번이나 일어나는 등 쇠퇴기에 빠졌고 곧 하띠엔의 수도가 점령당하자 막티엔투는 주군인 광남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광남국도 [[떠이선 농민 운동]]이 발생하는 등 지원해 줄 상황이 안되었기에 하띠엔 후국과 톤부리 왕조 간 교섭을 주도하여 휴전을 맺게 하였다. 하지만 주군국인 광남의 떠이선 운동은 계속되었고 결국 광남국은 수도 순화(順化)를 떠이선 당에게 빼앗기는 등 실질적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막티엔투는 당시 광남왕 [[응우옌푹투언]]과 합류하여 그에게 체면을 가리지 말고 중국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어떻게든 사직을 보존할 것을 건의했으나 안타깝게도 응우옌푹투언은 무능했으며 서산조의 지도자 [[꽝쭝|응우옌반후에]]의 집요한 추격으로 응우옌푹투언은 생포당했고 막티엔투는 어쩔 수 없이 시암으로 도주하였다. 도주하기 전 응우옌반후에는 그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막티엔투는 거부하였다. >「我臣事南天已二世矣,心如鐵石,雖死不改,其志安肯與汝賊輩作逆天之事乎?」 >---- >나의 대에 이르러 2대 동안 신하를 칭했기에 충절을 지킨다는 마음은 쇠, 돌과 같다. 죽여도 비틀 수 없을 것임을 맹세한다. 그러니 어떻게 너(汝) 같은 역적 놈과 하늘을 거스르는 일을 하겠느냐? >---- >《河仙鎮葉鎮鄚氏家譜》 - 응우옌반후에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며. 막티엔투는 후일을 도모하여 한때 적이였던 딱신에게 의탁했으나 1780년 시암의 상선 한 척이 구 광남을 지지하는 장수 두청인(杜淸仁)에게 약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딱신은 사람을 보내 두청인을 심문하게 했으나 별 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다만 서산조가 이 사건을 알게 된 후 밀서를 조작하여 시암에 사신을 파견해 '두청인과 막티엔투가 긴밀하게 협력하여 시암에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 이라는 등 무고를 하였다. 마침 두청인이 빼앗은 전함으로 서산과 싸우는 등 군사를 일으킨다는 모습으로 보일 소지가 다분하였기에 딱신은 그 무고를 믿어 구 광남국의 유신 등 여러 사람들을 처형하였고, 막티엔투 본인에게 처형의 날이 다가오자 1780년 11월 1일 향년 81세로 자결하였다. 이후 [[자롱 황제]]가 세력을 회복하자 막티엔투의 자손을 비롯한 막씨 일족은 하띠엔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으며 1822년 그의 충절을 높게 산 [[민망 황제]]에 의해 막티엔투는 다의지신(達義之神)으로 추존되는 등 황제가 친히 [[신격화]]를 하였으며 하띠엔의 미덕사(美德社)를 통해 그를 기리게 하였다. == 작품 == * 하띠엔 십영(河仙十詠) * 명발유어(明渤遺漁) == 관련 논문 ==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539982|鄚天賜의 작품세계 연구]] - 최귀묵 저. == 참고 항목 == * [[https://zh.wikipedia.org/wiki/%E9%84%9A%E5%A4%A9%E8%B3%9C|鄚天賜]] [[분류:베트남의 군주]][[분류:1700년 출생]][[분류:1780년 사망]][[분류:인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