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명''' ||<(> 매튜 고프[br]Matthew Gough || ||<-2> '''생몰년도''' ||<(> 미상 ~ [[1450년]] [[7월 5일]] || ||<-2>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웨일스]] || ||<-2>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 ||<-2> '''아버지''' ||<(> 오웬 고프 또는 데이비드 고프 || ||<-2> '''어머니''' ||<(> 헤이스 한머 || ||<-2> '''직위''' ||<(> [[기사(역사)|기사]] || [목차] [clearfix] == 개요 ==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역사)|기사]].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과 상대했다. == 생애 == [[웨일스]] 출신으로 전해질 뿐,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한머 가문의 집행관인 오웬 고프였으며, 어머니는 한머 가문의 가주인 데이비드 한머의 딸 헤이스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웨일스 북동부의 브롬필드 출신 영주의 후손인 데이비드 고프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이 평정된 뒤 잉글랜드군에 고용된 후 프랑스 전선으로 보내졌고, 1423년 [[크라방 전투]]에 참전했고, 1424년 [[베르뇌유 전투]]에 참전했다. 1429년 앙주 전선에서 활동했고, 1432년 생체네리 요새에서 프랑스군과 맞서다 생포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고, 1435년 [[생드니 공방전]] 도중에 생포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존 파스톨프]] 휘하에 들어가 노르망디 전선에서 활동했고, 1440년 아르플뢰르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 1450년 [[토머스 키리엘]]의 지휘하에 노르망디를 석권하려드는 프랑스군에 맞섰지만 [[포미니 전투]]에서 참패한 뒤 기병대를 이끌고 가까스로 빠져나가 바이외로 후퇴했고, 그곳 마저 위험해지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루앙, 기조르, 페이 드 코, 아르쿠르 등지에 영지를 두고 있었으나, 백년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전부 상실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토머스 스케일스]]와 함께 [[런던 탑]]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해 7월 초 잭 케이드가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이 런던에 진입하는 걸 막으려 했다가 7월 5일 런던 브리지에서 전사했다. 사후 런던에 있는 세인트 메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분류:영국의 귀족]][[분류:영국의 군인]][[분류:1450년 사망]][[분류:백년전쟁/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