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孟懷玉[br]맹회옥}}}''' || || '''작호''' ||파양현후(鄱陽縣侯) → 양풍현남(陽豐縣男) || || '''성''' ||맹(孟) || || '''이름''' ||회옥(懷玉) || || '''출생''' ||385년 ~ 415년 || || '''본관''' ||평창군(平昌郡) 안구현(安丘縣) || || '''부친''' ||맹작(孟綽) || || '''국적''' ||[[동진]]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의 장수로 [[맹용부]]의 형이다. == 생애 == 맹작의 조상은 평창군(平昌郡) 안구현(安丘縣) 출신이지만 [[영가의 난]] 이후에는 대대로 [[전장시|경구(京口)]]에 살았다. 동진의 건무장군 유유가 [[손은(동진)|손은]]의 반란을 토벌할 때 맹회옥은 유유의 사마로 종군했다. 또한 [[환현]]을 토벌할 때 전공을 세워서 파양현후(鄱陽縣侯)로 책봉되었다. 이후 유유가 진군장군이 되고 수도에 진수할 때 맹회옥은 다시 참군, 하비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407년, 영삭장군(寧朔將軍), 서양군(西陽郡) 태수, 신채군(新蔡郡) 내사로 전출되었다. 다시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제수되었고 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전임되었으며, 곧이어 단양부(丹陽府)의 군대를 거느려 석두(石頭)에 진수하였다. [[노순]]이 건강으로 침공해오자, 맹회옥은 연전하여 공을 세웠고 중군장군 자의참군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서도복]]이 상륙을 시도했으나 맹회옥에게 밀려서 실패했으며, 맹회옥은 노순이 남쪽으로 달아나자 노순을 추격했고 시흥에서 잔당을 모으고 있던 서도복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노순이 평정된 뒤에는 양풍현남(陽豐縣男)으로 책봉되고 식읍 250호를 받았다. 맹회옥은 뒤에 태위 자의참군, 정로장군을 맡았다가 412년에 강주 자사로 옮겼고 도독[* 도독 강주, 예주 서양군, 신채군, 여남군, 영천군, 사주 항농군, 양주 송자군 6주 제군사], 남중랑장(南中郞將)이 되었다. 이는 당시 형주 자사인 사마휴지가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유유가 사마휴지를 경계하여 맹회옥을 파견한 것이었다. 415년에는 지절이 더해졌다. 맹회옥은 부친상을 당하고 병에 걸려 퇴직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상주가 자신 밖에 없는 집안의 사정을 설명하며 다시 퇴직을 주청하자 비로소 수용되었다. 하지만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전에 사망했다. 파양현후 작위는 아들인 맹원(孟元)이 이었지만 맹원이 죽은 뒤 아들이 없어서 국이 단절되었다. 양풍현남 작위는 맹회옥의 차남인 맹혜희(孟慧熙)가 이었지만 죄를 지어 작위가 삭탈되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85년 출생]][[분류:415년 사망]][[분류:전장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