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메이지 덴노]]가 실은 [[카게무샤|다른 사람]]이었다는 [[일본사의 음모론]] 중 하나. == 상세 == 이야기는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인 [[고메이 덴노]]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메이 덴노는 1867년 1월 30일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에는 온갖 의혹이 뒤따랐다. 고메이 덴노의 죽음에 대해서는 [[도쿠가와 막부]] 측의 독살설과 [[이와쿠라 도모미]]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와쿠라 토모미]]가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고 본다. 심지어는 고메이 덴노를 '''변소에서 창으로 아래에서 찔러 죽였다'''는 음모론도 나돌았다.[* 굳이 변소 아래에서인 이유는 외상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흉기가 항문을 통해 들어가 안에서 찔렀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외상이 없도록 죽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고메이 덴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무쓰히토 황태자가 즉위한 것이 [[메이지 덴노]]이지만, 음모론자들은 [[고메이 덴노]]와 유약하고 퇴폐향락적인 무쓰히토 황태자를 [[이와쿠라 도모미]]를 주축으로 한 유신 지사들이 암살해버리고 다른 이를 즉위시킨 것이 [[메이지 덴노]]라고 주장한다. 음모론자들이 메이지 덴노 대역설의 근거로 제기하는 주장들은 * 무쓰히토 황태자는 예방접종을 받아서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고, 당연히 얼굴에 곰보 자국도 없었다. 그러나 즉위 후의 [[메이지 덴노]]는 입 주위에 곰보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메이지 덴노는 [[사진]] 찍기를 꺼렸으며, 곰보를 숨기기 위해 [[수염]]을 길렀다. * 겐지 원년, 즉 1864년에 일어난 금문의 변이 일어나자 무쓰히토 황태자는 포성과 [[궁녀]]들의 비명소리에 놀라 실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즉위 후의 [[메이지 덴노]]는 대단히 위풍당당한 성격의 소유자로 말을 타고 근위병을 사열했으며, 큰 목소리를 내지를 정도였다. * 무쓰히토 황태자는 매우 허약한 체질이었고 매년 [[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리고 궁녀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즉위 후 [[메이지 덴노]]는 90kg의 거구로서, 측근들과 [[스모]]를 해서 냅다 던져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 무쓰히토 황태자의 [[서예]]는 서투름 그 자체였고 정무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즉위 후의 [[메이지 덴노]]는 달필의 서예를 선보였고, 학문을 좋아해서 교양 수준이 무척 높았다고 한다. * 무쓰히토 황태자는 황태자 시절에 말을 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즉, [[승마]]를 못했던 걸로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즉위 후의 [[메이지 덴노]]는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직접 말을 타고 싸울 정도로 승마에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 무쓰히토 황태자는 [[오른손잡이]]였다. 그러나 [[메이지 덴노]]는 [[왼손잡이]]였다. [[일본 황실]]의 예법에서, 왼손잡이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음모론자들은 진짜 무쓰히토 황태자는 암살되었으며, [[이와쿠라 도모미]]가 [[조슈]]에 있던 [[남조]]의 후예인 오무로(大室) 가문의 [[오무로 도라노스케]](大室寅之祐)를 메이지 덴노로 내세웠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메이지 유신]]은 단순한 일본 근대화가 아니라 북조가 남조로 바뀌는 왕조 교체이고, 지금의 [[일본 황실]]은 남조의 후예들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이를 100% 믿을 수는 없다. 일부에서는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낸 루머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메이지 덴노]]가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했다는 점.(자세한 내용은 [[남북조정윤론]] 항목 참고) == [[조선]]에서 == 당대 조선에서는 메이지 덴노 대역설 보다는 [[고메이 덴노]] 독살설이 더 널리 알려졌는데, 고메이 덴노를 독살하고 메이지 덴노를 바꿔치기한 인물이 [[이와쿠라 도모미]]가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로 알려졌다. 한편으로 몸이 약해졌다는 메이지 덴노가 진행해야 할 의무를 대신하였던 [[카게무샤]](影武者)로 불리는 오무로 도라노스케(내정), 미쓰쿠리 게이고(외교)로 대용하였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이건 가능성이 희박하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연고였던 조슈 번은 조적(조정의 적)이라서 [[교토시|교토]]에 출입할 수 없었고 [[삿초 동맹]]과 조슈 정벌의 방비로 군비 확충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튼 고메이 덴노 독살설은 꽤 널리 알려져서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대한 공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 15가지'로 언급하는 것 중에도 [[고메이 덴노]] 독살설이 들어 있고, [[최익현]]의 격문에서도 '자기 나라 임금을 죽이고 다른 나라 임금까지 침범한 이토 히로부미는 마땅히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토벌해야 할 역적이다.' 라며 독살설을 주장했다. [[분류:음모론]][[분류:메이지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