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행궁]][[분류:덕수궁]][[분류:월산대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조선 후기에 지어진 행궁인 명례궁, rd1=무풍 명례궁)] ---- [include(틀:덕수궁)] [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축진찬의궤 - 중화전.png|width=100%]]}}} || || {{{#683235 '''《신축진찬의궤》에 나타난 월산대군의 저택시절의 명례궁 모습.[br]오른쪽 빨강색 원 안의 건물이 명례궁의 정전이었던 즉조당이다.[* [[https://blog.naver.com/minsu977/221265544721|사진 출처.]] 행랑이 서로 얽혀있고 사진 위의 [[덕수궁 즉조당]]과 우측 아래의 [[석어당]]의 모습도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1 明禮宮}}} [[조선]] 중기의 행궁이자 [[월산대군]]의 저택. [[임진왜란]] 이후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했던 곳이었다. 현재 [[덕수궁]] 영역의 일부에 있었다. 조선시대 당시 행정 구역은 한성부(漢城府) 남서(南署) 명례방(明禮坊)이었다. == 변천 == 명례궁이 있었던 자리는 원래 1469년([[예종(조선)|예종]] 1년) [[남이]]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던 조영달(趙穎達)의 집 터였다.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다가 1470년([[성종(조선)|성종]] 1년) 세종의 막내 왕자였던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宋氏)에게 하사했다.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연경궁으로 이름짓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 이는 [[성종실록]] [[성종(조선)|성종]] 2년 7월 24일의 기사에 나온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의경세자]]의 사우인 의묘를 연경궁 [[정원|후원]]에 세우기로 했다. 제사를 맡은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이곳을 하사 받았고, 이후 왕자의 저택이면서 사묘가 있는 제사궁이 되었다. 이후 1475년 의묘의 위판(位版)을 경복궁 내 연은전(延恩殿)에 옮겨 모시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만 기능했다. 1486년(성종 17)에는 잠시 [[옹주]]의 [[저택]]으로 하사되었다가, 1593년(선조 26) 10월 [[임진왜란]]으로 한양 내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 이곳을 행궁으로 사용했다.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은 1611년(광해군 3) 10월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받게 되면서 정식 궁궐로 승격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ob_10310011_001|#]] 그러나 광해군의 창덕궁 이어 이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행궁]] 대부분의 건물과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어 더 이상 [[행궁]]의 역할과 기능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명례궁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중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선조(조선)|선조]]가 23명의 [[왕자]]와 [[옹주]]에게 어전(漁箭)·염분(鹽盆)·시지(柴地) 등을 임시로 변통해 나누어 주었고, 뒤에 이 선례에 따라 궁방전(宮房田)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명례궁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인조의 즉위기였던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1011_002|1623년 1월 11일의 기사]]이다. 이후 고종 연간까지 꾸준히 자전(慈殿, 인조 연간), 중전(中殿, 현종 연간), 대비전(大妃殿, 숙종 연간),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숙종 연간), 양자전(兩慈殿, 숙종 연간), 동궁(東宮, 영·정조 연간)들의 내탕 마련과 궁가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관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사용할 [[경운궁]]을 확대 영건하면서 기능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명례궁의 건물들은 잘 남아있었다. 그러나 덕수궁 대화재로 모조리 사라져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1907년([[융희]] 원년) 통감부의 황실 재산 정리 과정에서 명례궁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어 현재 명례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609865|현재는 조선 초기와 중기의 명례궁을 연구한 자료를 통해서 명례궁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