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한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10E0E 0%, #A11 20%, #A11 80%, #810E0E)" {{{#ece5b6 '''명제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한 황태자)] ---- [include(틀:역대 전조 황제)]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01F31 0%, #7C283F 20%, #7C283F 80%, #601F31); color: #ece5b6" '''전조 추존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10E0E 0%, #A11 20%, #A11 80%, #810E0E); color: #ece5b6" '''한 제17대 황제[br]{{{+1 현종 효명황제 | 顯宗 孝明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hanmyeongje.jpg|width=100%]]}}} || ||<|2> '''출생''' ||[[28년]] [[6월 15일]] || ||[[후한]] [[허베이성|상산국]] [[스자좡시|원씨현]][br](現 [[허베이성]] [[스자좡시]] 위안스현) || ||<|2> '''즉위''' ||[[57년]] [[6월 10일]] || ||[[후한]]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br](現 [[허난성]] [[뤄양시]]) || ||<|2> '''사망''' ||[[75년]] [[9월 5일]] (향년 47세) || ||[[후한]]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 동궁 전전[br](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현절릉(顯節陵) || ||<|4> '''재위기간''' ||'''{{{#ece5b6 후한의 황태자}}}''' || ||[[43년]] ~ [[57년]] [[6월 10일]] || ||'''{{{#ece5b6 후한의 황제}}}''' || ||[[57년]] [[6월 10일]] ~ [[75년]] [[9월 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유(성씨)|유(劉)]] || || '''휘''' ||양(陽) → 장(莊)[* 맏형 유강이 황태자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책봉되면서 개명했다.] || || '''부모''' ||부황 [[광무제|세조]][br]모후 [[광열황후]] || || '''형제자매''' ||11남 5녀 중 4남 || || '''배우자''' ||[[명덕황후(후한)|명덕황후]] || || '''자녀''' ||9남 11녀 || || '''자''' ||자려(子麗) || || '''작호''' ||동해공(東海公) → 동해왕(東海王) || || '''묘호''' ||[[현종#s-1|현종]](顯宗) || || '''시호''' ||'''[[명(시호)|효명황제]](孝明皇帝)''' || || '''연호''' ||영평(永平, [[58년]] ~ [[75년]])[*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장제를 영평제(永平帝) 혹은 영평군(永平君)이라고도 한다.] || }}}}}}}}} ||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의 제2대 황제로, [[광무제]]의 넷째 아들이다. 생모는 [[광열황후|광열황후 음씨]]이다. == 생애 == 28년, 생모인 [[광열황후|광열황후 음씨]](당시는 귀인)가 원씨현에서 유양을 낳았다. 유양은 10살에 《춘추》를 읽어서 그에 능통했고, 아버지 광무제로부터 재능을 사랑받았다. 39년, 유양은 동해공에 봉해졌다. 41년 [[광무황후 곽씨]]가 총애를 잃고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행동하다가 결국 폐위되었고, 명제의 어머니인 음귀인이 황후가 되었다. 같은 해, 광무제의 아들 가운데, 황태자 유강을 제외한 9국공들의 작위를 왕으로 격상시켜 유양은 동해왕이 되었다.[* 동시에 황자가 아닌 황족 왕들은 지친인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후로 강등되었다.] 유양의 이복형인 유강은 어머니 곽황후가 폐위되었기에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말하였다. 43년에 광무제는 결국 이를 허락하여 황태자 유강을 동해왕으로 봉하였고, 동해왕이었던 명제를 태자로 삼고, 이름을 장으로 바꾸었다. 유장은 박사 환영을 스승으로 삼고, 《상서》를 배웠다. 57년 광무제가 붕어하자 황제로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30세였다. 명제는 아버지의 시정 방침을 계승한 정책을 실시했지만, 외교면에서는 광무제의 소극적인 정책을 고치고, 전한 무제가 진출한 서역 지방에 적극적인 진출을 하기 위해 [[반초]]를 내보냈다. 그 결과 반초는 [[장건#s-1|장건]]과 함께 서역 지방을 개척한 인물이 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도 당시라고 하며, 명제 때의 각종 칙령 및 발굴 결과를 통해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는 설이다.[* 서역에서 수입한 불상을 그림으로 그려 명제의 무덤인 현절릉(顯節陵)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사찰을 지었다는 기록은 딱히 없고,[* 백마사 창건 설화에서는 명제 당시에 백마사가 지어져 《사십이장경》을 봉안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십이장경》은 황실의 서고인 난대석실(蘭臺石室)에 보관해두기만 했다고 한다. 불교 사찰을 중국에 최초로 세운 사람은 [[영제(후한)|영제]]로, 궁중에 부처를 모신 사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명제는 불교를 어느 정도 영험하게 여기는 정도에서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불교는 [[도교]]와 연관돼 중국인에게 이해된 듯한데, 명제의 이복형인 초왕 유영(劉英)은 본래 도가 사상[* 당시에는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황제와 노자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에 관심이 있어서 그랬는지, 도가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는 불교에 유독 호감을 가져 목욕재계를 하고 부처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명제는 정신없는 정국을 많이 안정시키고, 빈민 구제, 농업 진흥 등을 해서 후한의 전성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마황후(馬皇后)[* 명덕황후 마씨. 후한의 개국 공신인 [[마원(후한)|마원]]의 딸이다. 생몰년은 40년 ~ 79년.]도 현명했다. 그 예로 명제는 법을 엄격하게 집행해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마씨가 이를 보고 감옥마다 사람들로 넘쳐난다며 명제에게 여러 차례 시정을 권했다. 그러자 명제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풀어주었고, 그 후로도 마황후와 자주 상의해서 일을 처리해나갔다. 또한 마황후는 붙임성이 좋았고, 평소에 포목 옷을 입었으며 치마를 입어도 호화로운 장식은 하지 않은 검소한 인물이었다. 마황후는 외척 마씨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몹시 경계해서 명제 3년에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남궁의 운대에 걸게 했을 때에도 개국 공신인 자신의 아버지 마원을 제외시켰다. 이렇게 명제는 내정과 외정을 강화하다가 75년에 병으로 인해 48세로 붕어했다. == 후비와 자녀 == * [[명덕황후(후한)|명덕황후 마씨]] * [[명제귀인 가씨]] * [[장제(후한)|장제]] * 평양공주 유노 * 귀인 음씨 * 양절왕 유창 * 귀인 염씨(언니) * 귀인 염씨(동생) * 귀인 진씨 * 생모 미상 * 천승애왕 유건 * 진경왕 유선 * 팽성정왕 유공 * 악성정왕 유당 * 하비혜왕 유연 * 획가장공주 유희 * 융려공주 유영 * 평씨공주 유차 * 심수공주 유치 * 평고공주 유소희 * 준의공주 유중 * 무안장공주 유혜 * 노양공주 유신 * 악평공주 유소영 * 성안공주 유소민 == 일화 == 능력이나 치적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성품은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 남의 비밀을 폭로하는 걸 좋아했다는 표현이 있다.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일화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루는 명제가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상서랑이었던 환관 약숭을 [[정장(동음이의어)|직접 장형으로 처벌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약숭은 견디다 못해 마루 밑으로 도망갔다. 명제가 당장 나오라고 호통을 치자 약숭은 "천자는 생각이 깊고 커야 하며, 제후는 깊이 생각하여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천자께서 상서랑 따위를 손댄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깨우친 바가 있었던 명제는 약숭을 용서해주었다.[* 흔히 정장을 명나라 때에 시작되었거나, 연원을 더 옛날로 잡아 수•당시대라고 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나, 명제와 몇몇 후한 황제가 신하를 직접 매질하려는 경우를 들어 후한을 그 기원으로 잡는 견해도 있다.] 이름이 '장'(莊)인 탓에 '장'(莊)을 '엄'(嚴)으로 [[피휘]]했고, 대부분의 장씨들도 엄씨로 성을 고쳤다. 그리고 이에 따라 후한 때 편찬된 《한서》에서도 선대의 장씨들을 모두 엄씨로 고쳐서 표기했기 때문에 전한의 많은 장씨들이 엄씨로 알려지게 됐다. 수필 《들사람 얼》에 나오는 엄자릉(엄광)도 실은 장자릉(장광)이요, 왕망 시절 고구려와의 싸움에 얽혀서 한국사에도 살짝 나오는 엄우도 실은 장우였던 것이다. == 둘러보기 == [include(틀:후한서)] [include(틀:후한기)] [[분류:한나라의 황제]] [[분류:28년 출생]] [[분류:75년 사망]][[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스자좡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