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이란 대통령)] ---- ||<-2> '''{{{#fff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7•8대 대통령[br]{{{+1 모하마드 하타미}}}[br]سید محمد خاتمی | Mohammad Khatam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Mohammad Khatami.jpg|width=100%]]}}} || || '''본명''' ||세예드 모하마드 하타미[br]سید محمد خاتمی[br]Sayyid Mohammad Khatami || ||<|2> '''출생''' ||[[1943년]] [[10월 14일]] ([age(1943-10-14)]세) || ||[[팔라비 왕조|이란 제국]] 야즈드주 아르다칸 || ||<|4> '''재임기간''' ||제7대 대통령|| ||[[1997년]] [[8월 3일]] ~ [[2001년]] [[8월 3일]] || ||제8대 대통령|| ||[[2001년]] [[8월 3일]] ~ [[2005년]] [[8월 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배우자''' ||조레 사데기^^(1974년 결혼)^^ || || '''자녀''' ||3명 || || '''학력''' ||이스파한 대학교[br]테헤란 대학교 || || '''종교''' ||[[이슬람교]]([[시아파]]) || || '''소속 파벌''' ||[include(틀:개혁파)] || || '''소속 정당''' ||[[전투 성직자 협회|{{{#!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A3CC; font-size: .9em" {{{#ffffff '''전투 성직자 협회'''}}}}}}]][* [[전투적 성직자회|{{{#!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9900; font-size: .9em" {{{#ffffff '''전투적 성직자회'''}}}}}}]]에서 분열된 [[개혁파]] 정당.] ||}}}}}}}}} || [목차] == 개요 == سید محمد خاتمی (1943. 10. 14 ~ [age(1943-10-14)]세) [[이란]]의 [[정치인]]이자 제7, 8대 [[이란 대통령|대통령]](1997 ~ 2005). == 생애 == [[아르다칸]]에서 [[성직자]] 루홀라 하타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스파한 대학교]]와 [[테헤란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74년 [[조흐레 사데기]]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막내 에마드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정치인이다. 밑으로 16살 어린 동생 [[모함마드레자 하타미]]가 있는데, 형과 마찬가지로 정치인이며 전직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바로 밑의 동생 [[알리 하타미]]도 정치인이고, 형의 대통령 재임 2기 때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런 배경을 보면, 하타미가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에서 자랐음을 보여준다. == [[이란 대통령|대통령]] == 이러한 [[가문]]의 후광을 바탕으로 1980년 [[국회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으며, 1982년부터 1992년까지 문화이슬람지도부 장관을 지냈다. 자연스레 대권주자로 급부상했고, 1997년 연임 제한으로 출마할 수 없게 된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를 대신해 대통령 후보로 출마, 69.07%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알리 악바르 나테그누리]] 당시 국회의장을 꺾고 당선되었다. 대표적인 중도파/[[개혁파]] 성향 정치인으로 청년층과 [[여성]]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슬람 보수주의 체제인 이란에서 나름의 [[개혁]]을 시도했다. [[표현의 자유]] 증진, [[사회자유주의|사회 정책 자유화]], [[경제적 자유주의|경제적 자유화]] 등 [[이슬람 자유주의]]에 기반한 펼쳤는데, 강경 보수 색채가 강한 이란에서 이 정도면 상당히 '''[[진보]]'''적이고 파격적이었다. 외교적으로도 [[유럽연합]] 등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도 나름 힘을 쓴 것은 덤.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과는 달리, [[이란 대통령|이란의 대통령]]은 [[라흐바르|최고지도자]]의 [[견제]]를 받는 [[직책]]이다. 문제는 최고지도자가 대표적인 [[원칙파]] 출신의 [[알리 하메네이]]라서, 하타미의 이러한 행보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여기에 보수파/원칙파들이 가세해 하타미의 이런저런 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허나 이것이 되레 여론의 분노를 자극했고, 2001년 대선에서 무려 '''76.90%'''의 득표율로 4년 전보다 더 큰 득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동정심을 받으며 압승한 정권이 으레 그렇듯이, 막상 재선에 성공한 뒤에는 각종 실책이 덮쳐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기 나름 그럴싸한 성과를 보이는 듯 싶었던 경제도 생각 외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 했고, 되레 화폐 가치가 추락하는 등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게다가 [[반미주의|반미]] 국가인 이란의 특성상 [[미국]]과의 관계 개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2001년 소위 "네오콘"으로 대표되는 [[조지 W. 부시]]가 당선된 것도 모자라,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진전을 보일 리가 없었다.[* [[사담 후세인]] 시기 [[이라크]]와 이란이 서로 으르렁댔지만, 정작 둘 다 반미 국가였던지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란 내에서 "이러다가 미국이 우리까지 침공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괜한 우려를 낳았다. --다행이도-- 그런 일은 없었지만.] 당연히 하메네이와 보수파들의 발목 잡기는 계속되었지만, 하타미와 개혁파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 했고, 되레 하메네이와 보수파 탓만 하는 등 일종의 [[책임전가]]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진짜 5년 넘게 한 게 뭐가 있냐?"며 비판을 받았다. 결국 2004년 총선에서 보수파가 원내 의석의 70% 가까이 점하면서 임기 말 제대로 [[레임덕]]이 걸리고 만다. 여기에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두고도 논란이 불거졌는데, 임기 종료를 코앞에 둔 2005년 4월 8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모셰 카차브]] 이스라엘 대통령 옆에 선 것이 문제가 되었다. 카차브가 이란 출신이었고,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름 얘기를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였다. 하지만 카차브가 아무리 이란 출신이었어도, 이란의 관점에서 명백히 '''적국'''인 이스라엘의 [[국가원수]]와 얘기를 나눈 것이 이란 내에서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었고, 귀국하자마자 온갖 비난에 시달렸다. 이스라엘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이슬람 국가]]의 수장이 '''[[천주교]]'''의 수장인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 자체만으로도 보수파들의 눈 밖에 제대로 나버린 것은 덤. 결국 임기 막판의 이러한 행보는 보수파들의 부활을 종용했으며, 역으로 개혁파는 저조한 인기 속에서 각자 따로 출마, 무려 전체 후보 7명 중 4명이나 되는 유례 없는 일이 발생한다.[* 이란의 정치 제도 자체가 보수파들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다보니 보수파들은 "어차피 당선될 것"이라는 생각에 대개 후보를 따로 내는 반면, 개혁파들은 불리한 제도 상 "혹시나 어부지리로라도 낙선할 것"을 우려해 대개 단일 후보를 낸다. 물론 "대개"라고 했지, "꼭"이라고는 안 했으며, 가령 2017년에는 총 후보 4명 중 개혁파와 보수파가 각각 2명이었다. 그나마 이 때는 [[하산 루하니]] 당시 대통령(개혁파)이 현직 프리미엄도 있었고, 상대편이 인지도가 영인 군소후보였으니 망정이었지, 2005년의 경우는 유력 후보들이 여럿 도전했으니 비교가 불가능하다.] 다만 이런 와중에도 인기가 아주 없지는 않았는지,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한 개혁파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이 1차에서 21.13%로 1위를 기록했으며, 개혁파들의 득표율 총 합계가 '''56.64'''라서, 예상 외로 개혁파의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점쳐졌다. 하지만 이런 예상이 무색하게, 2차 투표 후 뚜껑을 열어보니 보수파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61.69%'''를 득표하는 이변이 벌어지면서 개혁파들에게는 그저 [[아시발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1차 투표의 예상치 못 한 결과에 개혁파들이 제대로 단일화에 임하지 않은 반면, 보수파들이 행여나 하는 불안감에 아흐마디네자드로 결집하면서, 예상이 제대로 뒤집어진 것. 그렇게 나름의 개혁을 시도한 하타미는 쓸쓸하게 퇴임하게 된다. == 퇴임 이후 == 이렇게 대통령직을 마무리하면서 정계를 떠나는 듯 싶었지만, 아흐마디네자드 집권 이후 하타미의 개혁 성과들이 죄다 물거품이 되면서 다시 재평가 받기 시작했고, 2009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 보수파가 정권을 장악한 시점이었으니 개혁파가 야권이었다.]의 유력 후보로 급부상, 대통령직 복귀설이 나돌았다.[* 헌법 상 3선 연임이 금지되어 있을 뿐, 한 번 건너뛰고 복귀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물론 이란 역사 상 이렇게 대통령에 복귀한 사례는 전무하다.] 본인도 나름의 욕심이 있었는지 아흐마디네자드를 비판하는 등 목소리를 내면서 사실상 대권 행보를 보여 왔고, 2009년 2월 8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개혁파의 표 분산으로 인한 아흐마디네자드의 어부지리 재선 가능성을 우려한 나머지 3월 16일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고, [[미르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를 지지하면서 대선 출마는 없던 일이 되었다. 그리고 개표 결과 아흐마디네자드가 이미 1차에서 과반을 넘는 '''62.63%'''의 득표율로 압승하면서, 하타미 시절의 향수가 썩 자극되지 못 했음을 보여주었다. 그 후 2013년 대선에서도 다시금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하산 로하니]]를 지지하면서 발을 뺐다. 이후 로하니가 당선되면서, 나름의 위안거리가 된 모양. 옆나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자 여성과 소수민족들이 배제된 [[아프가니스탄|이번 탈레반 내각]]에 대해 비판했다. [[2022년 이란 시위]]에는 반정부 시위대의 요구를 귀 기울여 들으라고 촉구했다.[[https://m.yna.co.kr/view/AKR20221207036000009?section=international/all|#]] [각주][[분류:이란 대통령]][[분류:1943년 출생]][[분류:이란의 무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