沐並 생몰년도 미상 [[후한]],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자는 덕신(徳信). 사례 하간군 사람으로 젊은 시절에 외롭고 가난하게 되었고 원소를 섬겨 이름있는 관리가 되었으며, 융통성이 없었지만 인품은 공정하고 과단성이 있어 권력자에 대해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후에 [[조조]]를 섬겨 승상군모연을 지냈다. 황초 연간에는 성고령을 지냈고 교사인 [[유조(조위)|유조]]가 성고에 들렀다가 현 관리에게 짚과 곡물을 요구했는데, 그 때 [[메뚜기]]와 [[가뭄]]의 피해가 나타나 저축한 곡식이 없었다. 요구에 응하지 못하자 유조의 부하가 현 관리를 욕했고 목병은 노해 유조를 잡아들이려 했지만 유조가 이를 알아채 말로 달아나 이 사건을 보고했다. 목병은 체포되었지만 곤형을 받아 사형을 면할 수 있었으며, 목병은 형기가 끝나자 관리에 복귀했지만 10여 년간 자유롭게 지냈고 정시 연간에는 삼부장사를 지냈다. 241년에 오나라의 주연이 위나라의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이 조중을 점령했는데, 이 때 오군은 수군의 병사들에게 현산의 동쪽으로 선박용 목재를 베었다. 이 때 장가 출신의 인부와 병사가 식사를 만들어 먼저 익은 사람이 아직 익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걸고 같이 먹자고 했지만 아직 익지 않은 사람이 싫다고 했다. 그러자 먼저 익은 사람이 당신은 목덕신이 될 작정이냐고 물었던 것으로 보아 먼 지역에서도 그를 알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목병이 장사가 된 지 8년이 지나고 만년에는 지방에 나가 제음태수를 지내다가 부름을 받고 의랑이 되었으며, 60여 세가 되자 목병은 자신이 사망한 후 장례식은 간소하게 하도록 자식들에게 이야기했다. 가평 연간에 병이 심해져 위중하자 미리 매장용 구멍을 뚫어두라고 명령하면서 사망하면 자식 둘이서 시체를 구멍에 놓으며, 큰 소리로 울지 말고 읍만 하라 했다. 부인에게는 장사지내는 것도 하지 말고 조문객도 받지 않으면서 조와 쌀을 담은 음식을 두지 말라고 했다. 또 앞으로도 죽은 자에 대해 관을 내지 않고 묘에 흙을 담거나 나무를 심어서는 안된다고 했으며, 처자식은 그의 말을 따랐다. 그의 [[아들]]로는 목운(沐雲), 목의(沐儀) 등이 있다. [각주] [[분류:조위의 인물]][[분류: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