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1 苗授[br]묘수}}}''' || || '''시호''' ||장민(莊敏) || || '''성''' ||묘(苗) || || '''이름''' ||수(授) || || '''자''' ||수지(授之) || || '''생몰''' ||1029년 ~ 1095년 || || '''출신''' ||노주(潞州) || || '''부친''' ||묘경(苗京)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나라]]의 장수로 자는 수지(授之). 노주(潞州) 출신이다. == 생애 == 1029년 묘경(苗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묘경은 [[서하]]의 [[경종(서하)|이원호]]로부터 인주(麟州)를 사수하며 공을 세웠다. 묘수는 어린 시절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갔고 유학자 호원(胡瑗)에게 수학하여 국자생이 되었다. 묘수는 뒤에 [[한기(북송)|한기]]를 따라 섬서경략사준비차사(陜西經略司准備差使)가 되었고 음서를 통해 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 서경좌장고사(西京左藏庫使)까지 승진하였다. 묘수는 1073년 [[왕소(북송)|왕소]]에게 종군하여 선봉이 되어 향자성(香子城)을 함락시키고 하주(河州)를 탈환하였다. 하지만 강족이 다시 군대를 모아 향자성을 포위하자, 왕소는 전경(田瓊)에게 700명의 궁병을 주고 향자성을 구원하게 했으나 전경은 우정곡(牛精谷)에서 전사하였다. 결국 왕소는 다시 500명의 기병을 선발하여 묘수에게 주고 향자성의 구원을 명했다. 묘수는 밤에 출병하면서 사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벽에 적들을 물리치겠다! 묘수는 사졸들을 고무하여 강족을 물리쳤으며, 군대의 진군을 멈추고 2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 강족이 가마평(架麻平)에서 송군을 요격하여 송군의 장병들이 두려워하자, 묘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차적으로 진군하고 겁먹지 말라! 수백 개의 전패(氈牌)가 다시 도착할 것이다! 이에 송군의 선봉대가 진군하면서 강족은 혼란에 빠졌고 송군은 강족의 군사 4천 명을 참수하였다. 묘수는 다시 우정곡(牛精穀)에서 강족의 군대를 물리쳤으며, 여세를 모아 가낙성(珂諾城)을 함락시키고 정강채(定羌砦)와 영하채(寧河寨)를 축조하며 하황(河湟) 지역을 완전히 수복했다. 묘수는 이때의 공적으로 지덕순군(知德順軍)이 되었다. 1074년, 묘수는 충주방어사(忠州防御使), 황성사(皇城使)에서 서상각문사(西上閣門使)로 임명되었다. 청의결귀장(靑宜結鬼章)이 하주로 침공하자, 묘수는 선봉으로 하주 구원에 나섰다. 도서(洮西)를 지난 뒤 묘수의 진영 내에서 곧바로 하주로 진군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묘수는 살종(撒宗)으로 진군하자고 주장했고 살종에서 커다란 전공을 세워 지하주(知河州)로 임명되었다. 뒤에 묘수는 사방관사(四方館使)·영주자사(榮州刺史)가 더해졌으며, 연달(燕達)을 따라 은천(銀川)을 취하고 목정(木征)을 물리쳐 인진사(引進使)·과주단련사(果州團練使)·경원도검할(涇原都鈐轄)이 더해졌다. 묘수는 뒤에 [[요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신종(송)|신종]]이 묘수를 치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향자의 전투에서 그대가 적은 병력으로 적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거의 나의 대사를 그르칠 뻔했다. 묘수는 조정으로 돌아온 뒤 진봉로부총관(秦鳳路副總管)으로 임명되고 다시 희하로부총관(熙河路副總管)이 되었으며, 다시 지하주로 옮겼다. 또한 [[이헌(북송)|이헌]]을 보좌하여 노골산(露骨山)에서 생강(生羌)을 토벌하며 생강의 군사 1만 명을 참수하고 영계박(泠雞樸)을 사로잡았다. 이후 창주단련사(昌州團練使)·용신위사상도지휘사(龍神衛四廂都指揮使)로 임명되고 지웅주(知雄州)·지희주(知熙州)로 옮겼다. 원풍(元豊) 연간, 묘수는 고위채(古渭砦)에서 출병하여 정서채(定西砦)를 함락시키고 토번의 수령 우장화마(禹臧花麻)를 토벌하였다. 난주성(蘭州城)을 지을 때 여차곡(女遮谷)에서 서하의 군대와 조우하자, 직접 산에 올라 서하에게 역공을 가하기도 했다. 묘수는 천도산(天都山)을 넘어 남모(南牟)를 불태우고 몰연(沒煙)에 주둔하며 100일 동안 행군하고 1천 리를 전전하다가 비로소 변경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묘수는 보군부도지휘사(步軍副都指揮使)·무위군(威武軍) 절도관찰유후(節度觀察留後)를 역임하였으며, 1088년 무태군절도사(武泰軍節度使)·전전부도지휘사(殿前副都指揮使)로 승진하였다. 1089년, 보강군절도사(保康軍節度使)로 지노주(知潞州)에 부임하고 상청태평궁(上淸太平宮)의 제거(提擧)를 맡았다. 1094년 다시 입조하여 전전부도지휘사가 되었으며, 1095년 사망하여 개부의동삼사로 추증되고 장민(莊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수의 손자인 묘부는 정강의 변 이후 유정언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고종(송)|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고종의 태자 [[조부(남송)|조부]]를 황제로 내세운 묘유병변의 주동자로 활동했기에 반신전에 열전이 있다. == 여담 == 묘수는 일에 마주칠 때 자신의 지론을 펼치되 아부하지 않았다. 묘수가 지덕순군을 맡을 때 어떤 이가 전남(籛南)에 성을 지을 것을 건의하자, 묘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남은 땅이 황하에 막혀서 군량을 운반하기 어려우니 만전지계가 아니다. 송군이 영무(靈武)를 정벌할 때 조정에서 묘수에게 고준유(高遵裕)를 지원하도록 명하자, 묘수는 출병의 이해득실을 조목별로 진술하기도 했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29년 출생]][[분류:1095년 사망]][[분류:창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