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fff 한문정공(韓文貞公)[br]{{{+1 苗晉卿 | 묘진경}}}}}}''' || || '''{{{#fff 작호}}}''' ||<(> 한국공(韓國公) || || '''{{{#fff 시호}}}''' ||<(> 문정(文貞) || || '''{{{#fff 성}}}''' ||<(> 묘(苗) || || '''{{{#fff 이름}}}''' ||<(> 진경(晉卿) || || '''{{{#fff 자}}}''' ||<(> 원보(元輔) || || '''{{{#fff 부친}}}''' ||<(> 묘태서(苗殆庶) || || '''{{{#fff 조부}}}''' ||<(> 묘기(苗夔) || || '''{{{#fff 출생}}}''' ||<(> 685년 ~ 765년 || || '''{{{#fff 출신}}}''' ||<(> 노주(潞州) 호관현(壺關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 중기의 재상으로 자는 원보(元輔). == 생애 == 노주(潞州) 호관현(壺關縣) 출신으로 685년에 묘태서(苗殆庶)의 아들로 태어났다. 묘진경의 조부인 묘기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훗날 묘진경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묘진경의 부친인 묘태서는 강주(絳州) 용문현승(龍門縣丞)을 지냈고 이후 태자소보로 추증되었다. 묘진경은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회주(懷州) 수무현위(修武縣尉)로 관직을 시작하여 봉선현위(奉先縣尉)를 역임하다가 과실로 인해 서주(徐州) 사호참군(司戶參軍)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만년현위(萬年縣尉), 시어사(侍御史), 탁지원외랑(度支員外郞),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을 역임하였다. 735년 이부낭중으로 승진하고 736년 손적(孫逖)과 함께 중서사인으로 임명되었다. 739년 관리의 선발을 맡았다. 묘진경은 성품이 겸손하고 부드러워서 좋은 관직을 요구하거나 불손한 언사를 하는 사람이라도 용서했다. 741년에는 이부시랑으로 임명되었는데, 묘진경이 관리의 선발을 맡을 때 당나라의 정치는 이미 해이해졌고 뇌물이 성행하고 있었다. 또한 선발을 기다리는 관원이 1만 명에 달했고 [[이임보]]가 조정을 장악하면서 관리의 선발은 묘진경과 이부시랑 송요(宋遙)에게 위임했다. 743년, 어사중승(御史中丞) 장의(張倚)의 아들인 장석(張奭)이 관리로 선발되기를 기다렸다. 이때 묘진경과 송요는 장의가 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장의에게 빌붙으려고 64명의 관원들 중 장의를 1등으로 올렸지만 장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조정 내외에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이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이후 계현령(薊縣令)이었던 소효온(蘇孝慍)이 [[안녹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안녹산은 다시 이 사실을 [[현종(당)|현종]]에게 알렸다. 현종이 화악루에서 시험에 참석할 때 장의는 결국 백지답안을 제출했다. 이 사건은 현종의 분노를 사서 묘진경은 결국 안강군(安康郡) 태수로 좌천되었으며, 당시 이를 예백(曳白)으로 일컬었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묘진경은 난리를 피해 금주(金州)로 달아났다. 한편 현종이 촉으로 피난하고 현종의 태자인 이형이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숙종이다. 숙종은 봉상(鳳翔)에 당도하여 묘진경을 행재소로 불러들였고, 묘진경은 바로 그날 숙종에 의해 좌상(左相)으로 임명되었다. 여담으로 구 초나라 왕실의 후손이라고 한다. 성인 묘苗가 그 [[묘족]]할 때 묘와 같은 한자이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85년 출생]][[분류:765년 사망]][[분류:창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