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남제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873C0 0%, #3797E8 20%, #3797E8 80%, #1873C0); color: #ece5b6" '''남제 제2대 황제[br]{{{+1 세조 무황제 | 世祖 武皇帝}}}'''}}} || ||<|2> '''출생''' ||[[440년]] || ||[[송(남조)|유송]]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br](現 [[장쑤성]] [[난징시]]) || ||<|2> '''즉위''' ||[[482년]] [[4월 11일]] || ||[[제(남조)|남제]]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br](現 [[장쑤성]] [[난징시]]) || ||<|2> '''사망''' ||[[493년]] [[8월 27일]] (향년 53세) || ||[[제(남조)|남제]] [[장쑤성|단양군]] [[난징시|건강현]] 황궁[br](現 [[장쑤성]] [[난징시]]) || || '''능묘''' ||경안릉(景安陵) || ||<|4> '''재위기간''' ||'''{{{#ece5b6 남제의 황태자}}}''' || ||[[479년]] [[5월 29일]] ~ [[482년]] [[4월 11일]] || ||'''{{{#ece5b6 남제의 황제}}}''' || ||[[482년]] [[4월 11일]] ~ [[493년]] [[8월 27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소(성씨)|난릉 소씨]] || || '''휘''' ||색(賾) || || '''부모''' ||부황 [[고제(남제)|태조]][br]모후 고소황후 || || '''형제자매''' ||19남 3녀 중 장남 || || '''배우자''' ||무목황후 || || '''자녀''' ||23남 3녀 || || '''아명''' ||용아(龍兒) || || '''자''' ||선원(宣遠) || || '''작호''' ||문희후(聞喜侯) → 문희공(聞喜公) || || '''묘호''' ||'''[[세조]](世祖)''' || || '''시호''' ||무황제(武皇帝) || || '''연호''' ||영명(永明, [[483년]] ~ [[493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제]](南齊)의 제2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자는 선원, 아명은 용아. 재위 기간 동안 영명(永明)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482년, 488년, 490년 북조의 [[북위]]([[효문제]])와 [[백제]]([[동성왕]])의 충돌 기록이 있는데 소색은 이때 남조의 황제였다. == 생애 == 소색은 고제 소도성과 유지용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원가 17년(440년) 6월에 건강 청계궁에서 태어났다. '''소도성이 13살에 본 아들'''로 소색은 초기에 송나라 감령에 임명되었고, 영광 원년(465년) 강주 자사 진안왕 유자훈의 난이 일어나자 소색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남강상 심숙지에게 구금되었다가 친척 소흔조, 문객 환강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100명을 이끌고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아버지 소도성이 [[송순제|순제 유준]](順帝 劉準)을 옹립하자, 그는 좌위장군에 임명되어 진희왕 유섭을 보좌했다. 심유지(沈攸之)의 난이 일어나자 모두가 건강으로 돌아갈 것을 제의했으나, 소색은 과감하게 분구를 수비하기로 결정했고 소도성은 건강에서 '''오오, 넌 내 진짜 아들임ㅋ'''라고 칭찬했다. 승명 3년(479년) 정월, 소색은 상서복야, 중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가 되었고 3월에는 남예주자사가 되었으며, 6월 소도성이 즉위한 후에 황태자가 되었다. 그렇게 건원 4년(482년) 3월, 소도성이 죽자 43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즉위 후에는 건평왕 [[유경소]], 중서령(尚書令) 원찬(袁粲), 상서 유병, 형주자사(荊州刺史) 심유지(沈攸之)를 신원하고 예로서 그들을 다시 안장했다. 제무제 소색은 지속적으로 호적을 정리하고 엄명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영명 4년(486년), 관군이 당우지의 난을 평정한 틈을 타서 백성들을 약탈한 사실이 드러나자 이를 알게 된 무제 소색은 자신이 신임하던 장군 진천복이 당시 책임자였다는 이유로 기시형에 처하고, 이를 조정 내외에 알려 위엄을 떨쳤다. 무제 소색은 송나라 유씨들이 골육상잔을 일으킨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형제들이나 종실을 죽이지 않았고, 큰 전쟁이 없어서 치세가 안정되었다. 이에 국내의 생산이 발전했다. 그러나 무제 소색은 보복심이 강해서 태자로 있을 때, 사공자의 순백옥이 소색의 잘못을 소도성에게 밀고하여 질책을 받고 하마터면 폐위될 뻔 했던 일로 원한을 품고 즉위 후에 난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순백옥을 죽였다. 영명 11년(493년) 7월, 소색은 재위 12년 만에 54세의 나이로 건강에서 죽었다. 9월에 경안릉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장손 소소업이 뒤를 이었다. == 둘러보기(계보) == [include(틀:남제서)] [include(틀:남사)]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440년 출생]][[분류:493년 사망]][[분류:난릉 소씨]][[분류:난징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