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원사)] [include(틀:사준사구)] ||<:><-3> {{{#fff '''몽골 제국의 명장'''[br]'''노국충무왕(魯國忠武王)'''[br]{{{+2 '''ᠮᠣᠬᠣᠯᠢ[br]木華黎[br]무칼리'''}}}}}} || ||<-3> [[파일:4308352af393dcf754c6bcfa9b2b868f.jpg|width=300]] || ||<-2> '''{{{#fff 본관}}}''' || 잘라이르족 || ||<-2> '''{{{#fff 작위}}}''' || 노국왕(魯國王) || ||<-2> '''{{{#fff 시호}}}''' || '''[[충무(시호)|충무]](忠武)''' || ||<|2> '''{{{#fff 이름}}}''' || '''{{{#fff 몽골어}}}''' || [[몽골 문자|ᠮᠣᠬᠣᠯᠢ]][br][[키릴 문자|Мухулай]] || || '''{{{#fff 한자}}}''' || 木華黎(목화려) [br] 木中合黎(목중합려) || ||<-2> '''{{{#fff 부친}}}''' || 孔溫窟哇(공온굴왜) || ||<-2> '''{{{#fff 생몰년}}}''' || 1170년 ~ 1223년 || [목차] [clearfix] == 소개 == [[몽골 제국]]의 명장. [[칭기즈 칸]]이 가장 신임했던 장수들인 '''[[사준사구]]''' 중 전략가형인 '''사준'''의 한 명으로 몽골의 한 부족인 잘라이르(자라일)족 사람이다. 뛰어난 지략을 가졌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 생애 == [[자무카]]와 칭기즈 칸이 벌인 달란 발주트 전투(13익 전투, 1190년)[* 기록에 따라 승패 여부가 다르지만 양쪽 다 크나큰 손해를 입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자무카가 치노스족[* 이름의 뜻은 늑대로 몽골의 시조가 푸른 늑대를 아버지로 둔 사람인 걸 감안하면 몽골계 민족 중 몽골의 원류라 불리는 순수혈통이었다.]의 남성들을 잔인하게 [[팽형]]에 처하는 것을 보고 그의 밑을 떠났다. 1196년부터 칭기즈 칸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여 몽골 고원의 통일에 공을 세웠고, 1206년에 좌익의 만호장에 임명되었다. 1207년에 칭기즈 칸이 제1차로 [[서하]]를 공격할 때 참전했으며, 1211년에 [[제베]]와 함께 [[금나라]] 1차 정벌 때 선봉으로 참전했다. 본군을 이끌고 [[만리장성]]의 일부인 야호령을 공격했으며 별동대를 이끌고 장가구를 공격한 제베와 함께 금나라의 정예군을 격파하고, 만리장성의 주요 요새 중 하나인 대동부를 공격했으나 몽골군이 공성전에 서툴렀기 때문에 퇴각했다. 1213년에 칭기즈 칸이 직접 제2차 대금 정벌에 참전하면서, 만리장성에서 몽골의 7만 병력이 금나라의 65만의 병력을 격파하자 군사들을 지휘하여 제남, 장안, 요서, 요동 등의 금나라 화북 지방의 주요 영토를 함락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칭기즈 칸으로부터 화북 일대의 통치권을 하사받고, 국왕의 칭호를 받아 무칼리 국왕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쿠빌라이 칸이 제후왕들을 책봉하기 전에 있었던 유일한 제후왕이었다. 특히나 그 명칭이 군왕이 아니라 '''국왕'''으로, 국왕가인 무칼리 가문이 [[쿠릴타이]]의 수장을 맡아왔다는 점에서 무칼리 국왕가의 위치를 짐작해볼 수 있다.] 몽골의 다섯 부족과 투항한 한인으로 이루어진 혼성군을 이끌고 금나라 공략을 수행했다. 프랑스 학자 르네 그루셰에 따르면 무칼리는 칭기즈 칸을 충실히 본받고자 했으며 남의 말을 잘 들었다. 한번은 몽골군에 항복한 금나라 출신의 장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중원은 이미 무칼리가 거의 평정했으니 앞으로 [[몽골인]]의 정복을 위해서라도 민간인 학살은 금지해야 된다고 간언하였다. 정작 무칼리는 화를 내지 않고 그의 의견이 옳다고 반응하며 이를 받아들여 약탈과 학살을 금지했다. 덕분에 몽골군은 호라즘을 비롯한 서쪽과는 달리 중국에서 더 많은 학살은 저지르지 않으면서도 착실히 점령을 계속할 수 있었다. 산서의 중요한 요새였던 하중을 기습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금나라의 저항이 거세어 [[카이펑|개봉]]에서 패배했다. 무칼리는 열심히 전투를 한 나머지 과로로 쓰러지게 되었고 금나라를 멸하지 못한 것에 한을 품고 실의에 잠긴 채, 1223년 병사했다. == 사후 == 사후 그의 동생인 다이순과 아들인 [[보로#s-1|보로]]가 뒤를 이어 아들들과 함께 금나라를 공격했으며, 그의 일족은 몽골 제국([[원나라]])의 4대 명문 중의 하나로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나머지 세 가문은 보오르추, 티라운, 수부타이의 일족이었다.] 덧붙여 고려 말에 고려를 침공했지만 [[이성계]]에게 박살난 [[북원]]의 군벌 [[나하추]]가 바로 이 무칼리의 후손이었다. 이성계에게는 호되게 당했지만 요동 지역에서 할거해 반독립적인 세력을 일구며 한 때 명나라를 자주 괴롭히곤 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중심의 [[수흐바타르 광장]][* 정권에 따라 이름이 칭기즈칸 광장과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왔다갔다 한다.]에 무칼리와 [[보오르추]]의 기마상이 세워졌는데, 칭기즈 칸의 동상 옆에서 아직도 주군을 수호하고 있다. == 여담 == 유명한 일화로는 칭기즈 칸과 단 둘이서 길을 가다가 습격을 받았는데 칭기즈 칸을 대피시키고 홀로 적들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중국을 통치하는 시기에 송나라에서 온 대사와 사이가 좋아 어느날 연회가 있었는데도 이 대사가 초대받지 않아 오지 않자 섭섭해 하며 다음에는 와달라고 했다. 대사의 얘기에 따르면 아내가 8명으로 4명은 금나라의 공주이며 4명은 타타르족의 여자였다고 한다. 그의 한자명인 목화여라는 이름 때문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의 주장으로 고려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또 [[환빠]]들을 통해 정설인 양 유포되어 버렸다. 사실상 칭기스칸의 호라즘 정벌 당시 금나라 방면의 독립적인 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칭기스칸의 휘하에 들어간 시기가 늦어서 그런지 은근히 존재감이 없다. 창작물에서도 취급이 별로 좋지 않은 듯. 무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중원을 평정하고 금나라 방면 전선에서 작전을 이어나가던 도중 어느날 500명의 병력과 함께 평정한 중원을 순찰하며 가던 도중 2만명 가량의 금나라 잔존군의 습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500명의 병력으로 이 금나라 2만 병력을 와해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무력과 지력에 출중한 장수였다. == 대중매체에서 == || [[파일:무칼리 징기스칸 4 일러스트.png]] || ||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선 역시나 강캐. 전투 능력치만 보면 [[수부타이]]보다 떨어지지만 평균적인 능력치로는 다 높다. [[원조비사]]때는 정치 고문으로 있을 정도(정치가 B). 물론 전투력과 지휘력도 B에 매력이 A라서 정치 고문으로만 써먹기 굉장히 아깝다. 그냥 대충 정치력 높은 이를 등용하면 정치 고문 자리를 넘겨버리고 무칼리는 장수로 활동시키는 게 낫다. [[징기스칸 4]]에서도 정치 78, 전투 91, 지모 84의 만능형의 인재로 내정과 전투 양면에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초기 등장 인물은 아니어서 첫턴째 등용으로 등장하는데, 이 때 오논에 등장할지 고르고낙에 등장할 지는 랜덤성이 있다. 아마 초기 등장 위치가 오논과 고르고낙 중간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듯 해서, 어느 한 쪽이 시작하자 마자 도시 확장을 시도하면 그쪽으로 확 기울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고르고낙에 등장하여 [[제베]], [[줄치다이]], 군주인 [[자무카]]와 함께 주력군을 형성하지만, 무칼리마저 오논에 넘어가면 고르고낙은 망했어요 분위기가 된다. 무협 소설 [[사조영웅전]]에서 조연 캐릭터로 등장한다. [[분류:몽골 제국의 인물]][[분류:사조영웅전의 등장인물]][[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122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