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일본군/장성급 장교)] [include(틀:일본군의 전쟁범죄)] ||<-2> '''{{{+1 무토 아키라}}}[br]武藤 章|Muto Akira''' || ||<-2>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MutouAkira.jpg|width=100%]]}}} || ||<|2> '''출생''' ||[[1892년]] [[12월 15일]] || ||[[일본 제국]] [[구마모토현]] [[아소군]] 미나미아소촌 || ||<|2> '''사망''' ||[[1948년]] [[12월 23일]] (향년 56세) || ||[[연합군 점령하 일본|일본국]] [[도쿄도|도쿄시]] [[스가모 형무소]] || || '''소속''' ||[[일본제국 육군]] ([[1913년]] ~ [[1945년]]) || || '''최종 계급''' ||[[중장]] || || '''학력''' ||[[육군대학교]] || 일본군 중장.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필리핀에서 포로 학살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전범의 사형 방식인 [[교수형]]에 처해졌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다른 독일군 및 일본군 군인 전범처럼 군복의 치장을 탈거당한 후 맨 군복 차림으로 재판에 임했고, 무토 아키라는 다나카 류키치가 자신의 군부 내에서의 움직임을 법정에 폭로한 것에 대해 사사카와 료이치에게 "내가 만일 교수형이 된다면, 다나카의 몸에 씌어서 미쳐 죽게 해 주마!"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나카 류키치와 사이가 서로 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직 군인 신분으로 [[총살형]]이 아닌, 일본으로부터 태평양 전쟁에서 지옥을 맛본 미국의 반대로 인해 교수형이 선고되면서, 스가모 구치소에서 죄수복을 입고 교수형에 처해졌고, 시신은 [[화장(장례)|화장]]되어 유골은 태평양에 뿌려졌으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였던 산몬지 쇼헤이가 다른 6명의 전범들 유골과 함께 한 항아리 분량을 빼돌려 [[순국7사묘]]에 묻었다. [[분류:일본 제국의 군인]][[분류:1892년 출생]][[분류:1948년 사망]][[분류:미나미아소촌 출신 인물]][[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교수형된 인물]][[분류:정4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