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의 배향공신)] ||<-2> '''{{{#white {{{+1 남평 문씨 가문 출신 배향공신}}}}}}''' || || '''{{{#white 의종}}}''' || '''{{{#white 명종}}}''' || || '''{{{#white 정경공 문공원}}}''' || '''충숙공 [[문극겸]]''' || ||<-2> '''고려국 춘추관 차관[br]고려국 상서성 이부 장관[br]고려국 중서문하성 차관[br]{{{+1 문공원}}}''' || || '''시호''' ||'''정경공(貞敬公)''' || || '''본관''' ||[[남평 문씨]](南平 文氏) || || '''출신지''' ||[[전라도]] [[나주시|남평현]] || || '''이름''' ||공원(公元) || || '''묘지''' ||조양산(朝陽山) 동쪽 언덕 [br] → 오관산(五冠山) 천태사(天台寺) 근처 || || '''생몰연도''' ||1084년 ~ 1156년 12월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중기의 문관으로, 무인 관리 집안 출신이다. 후 [[문공인]], 문공원, 문공유 삼형제가 가문을 크게 일으킨다. 고려사엔 본인의 기록이 적지만 본인의 묘지명이 현존하여 기록이 살아남았다. == 가족관계 == 본관은 [[남평 문씨]](南平 文氏)이다. 본인 문공원 묘지명엔 자신의 증조부와 조부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절묘하게 그 부분들만 훼손되어 누구였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조부의 생전 관작은 알아볼 수 있는데, 신호위 [[대장군]](神虎衛 大將軍) 및 초맹 중랑장(抄猛 中郎將) 직을 맡고 있었다. 전자는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 중 신호위 소속 대장군[* 무관직 중 서열 2위.]이며 후자는 초맹반 소속 중랑장[* 무관직 중 서열 4위.]이다.[* 초맹반은 고려명종이 조직한 국왕 친위대인데, 명종보다 한참 전 예종 ~ 인종 대 인물인 문공원의 조부가 소속되어있다. 아마 묘지명과 고려사 중 한쪽이 틀린 것으로 보인다.] 즉 문공원은 무관 집안 출신이다. 후 아버지 [[문익(고려)|문익]](文翼)이 [[중서문하성]] 소속 정3품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직까지 올라가 중견 문관직을 맡았다. 어머니는 부인 유씨(柳氏)다. 형으론 문공인(文公仁)이 있으며 동생은 남평군 개국자(南平郡 開國子) 문공유(文公裕)이다. 조카로 문공유의 아들 [[문극겸]]이 있다. 문공원은 [[인천 이씨]] 가문 [[이자연(고려)|이자연]]의 손녀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선 아들이 없었고 딸이 4명 있었다. 딸 모두가 장성해 결혼했다. 이 중 본인의 외손자이자 3녀의 아들 조영심(趙永心)이 문공원의 행장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 일대기 == * 직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 판이부사(判吏部事) - 수국사(修國史) * 시호: 정경공(貞敬公) 묘지명에 기록된 문공원의 마지막 관작이다. 고려사엔 그의 시호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묘지명 덕분에 알 수 있다. 문공원은 나름 높은 무관 가문 출신이다. 조부가 대장군이었는데, 이는 상장군 8명, 대장군 8명이 모이는 중방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고위 관직이었다. 그의 아버지 문익이 무관이 아닌 문관직을 제수하는데 성공했고, 이는 문씨 삼형제가 음서로 관직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문공원은 처음엔 음서제로 낮은 관직을 얻었지만 인종 대의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하면서 화려하게 커리어를 시작한다. 인종은 그를 마음에 들어 했고, 점차 승진해 봉각(鳳閣)[* [[중서문하성]]의 별칭. 고려 최고 정부기관이기에 이런 별칭이 있다.]에서 일하며 강한 발언권을 가지게 됐다. 인종 대에 여러 일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묘지명이 훼손되어 알기는 어렵다. 후 만73세의 나이로 죽었고, 의종은 직접 묘지를 선정해주어 조정의 원로에게 예우를 갖추었다. [[분류:고려의 배향공신]][[분류:남평 문씨]][[분류:1084년 출생]][[분류:1156년 사망]][[분류:나주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