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보스포로스 국왕)] ||<-3><#FFD700> '''{{{#FFF 보스포로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왕조 제4대 군주}}}''' [br] {{{+2 {{{#FFF '''Mιθριδάτης | 미트리다테스 2세'''}}}}}} || ||<|3><#FFD700> '''{{{#FFF 제호}}}''' ||<#FFD700> '''[[한국어|{{{#FFF 한국어}}}]]''' ||미트리다테스 2세 || ||<#FFD700> '''[[그리스어|{{{#FFF 그리스어}}}]]''' ||Mιθριδάτης || ||<#FFD700> '''[[라틴어|{{{#FFF 라틴어}}}]]''' ||Mithridates II || ||<-2><#FFD700> '''{{{#FFF 생몰 년도}}}''' ||미상 ~ 기원전 44년 || ||<|4><-2><#FFD700> '''{{{#FFF 재위 기간}}}''' ||기원전 47년 ~ 기원전 44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보스포로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왕조 4대 군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보스포로스 군주로 선임되었지만 [[아산드로스]]에게 폐위되었다. == 생애 == [[폰토스 왕국]] 제8대 군주 [[미트리다테스 6세]]와 갈라티아 출신의 정부 대 아도보기오나의 사생아이다. 여자 형제로 소 아도보기오나가 있었다. 그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59년 아시아 총독을 맡다가 속주민을 약탈한 혐의로 기소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의 재판 때 기소를 위한 주요 증인 중 한 사람이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플라쿠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갑옷을 입은 채 로마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기원전 48년 12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위급한 지경에 몰리자 아시아 속주 총독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칼비누스는 그에게 시리아와 킬리키아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카이사르를 도우라고 지시했다. 그는 재빨리 군대를 모아 기원전 47년 1월 육로를 통해 펠루시움으로 이동하여 하루만에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점거한 후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그를 저지하고자 [[나일 강]] 삼각주에 도착한 그를 공격했지만 격파당했다.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 봉쇄가 풀리자 즉시 도시를 빠져나가 그와 합세했고, 뒤이은 나일 강 전투에서 그의 활약에 힘입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이집트 [[파라오]]로 공인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이두매인 통치자 안티파트로스로부터 3,000 명을 지원받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유대의 [[대제사장]] [[요한 히르카노스 2세]]도 이 원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에서 소아시아를 침략하던 그의 이복형이자 폰토스 왕국의 왕 [[파르나케스 2세]]를 무찌른 후, 카이사르는 자신을 도와준 그에게 보답하고자 보스포로스 왕국의 군주로 임명했다. 그는 즉시 흑해 연안을 따라 이동해 파르나케스 2세를 제거했지만 카이사르로부터 "군주를 시해한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아산드로스]]와 [[뒤나미스(보스포로스)|뒤나미스]] 부부를 몰아내고 보스포로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뒷배가 사라지자 아산드로스의 반격을 받고 폐위되었다. 그는 이때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류:보스포로스 국왕]][[분류:기원전 44년 사망]][[분류:폐위된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