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광복군/군인]] [[분류: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대한민국의 군인]] [[분류:6.25 전쟁/군인]] [[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1909년 출생]] [[분류:1976년 사망]] [[분류:독립유공자 후손]] [[분류:건국훈장 독립장]] [include(틀:해군사관학교장)] ||<-2>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민영구}}}[br]閔泳玖'''}}}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민영구.jpg|width=100%]]}}} || || '''초명''' ||모세|| ||<|2> '''출생''' ||[[1909년]] [[7월 21일]] || ||[[한성부]] [[종로구]] || ||<|2> '''사망''' ||[[1976년]] [[2월 11일]] (향년 66세)|| ||[[서울특별시]] [[세브란스병원]]|| || '''본관''' ||[[여흥 민씨]]|| || '''가족''' ||아버지 민제호[br]삼촌 [[민필호]]|| || '''학력''' ||인성학교 {{{-2 (졸업)}}}[br]원동중학교 {{{-2 (졸업)}}}[br]만국항해학교 {{{-2 (졸업)}}}|| || '''경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상교참모[br][[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총무처장[br][[대한민국 해군본부|해군본부]] 작전참모부장[br]제9대 [[해군사관학교]]장|| ||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한국]]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이자 해군 [[제독]]. 제9대 [[해군사관학교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1909년 7월 21일 [[한성부]] [[종로구|종로]]에서 민제호[* 독립운동가 [[민필호]]의 형이자 임시 의정원 의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부친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는 인성학교를 거쳐 원동중학교, 만국항해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당시 상해화풍수선회사의 선장으로 근무해 한커우에서 [[난징]]으로 군수품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하자 [[지달수]][* [[지청천]] 장군의 장남], 김태산, 나태섭과 주계장에 임명되고, 1941년 광복군에서 경리업무를 맡았다. 1942년에는 [[창사]]와 [[광저우]]에서 항일 선전공작을 전개하였고, 동년 12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에 근무하며 회계업무를 담당했다. 1943년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이끌고 [[류저우]]로 이동해 항일가극단을 조직해 항일 선무공작에 힘썼고, 광복군 총사령부 주계과장으로 광복군 대원들의 보급을 담당했다. 1944년 6월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과원으로 경호업무를 맡았고, 1945년 2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경리국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총무처장으로 행정, 재무업무를 맡다가 1947년 11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대한민국 해군]]장교로 임관하여 인천만 기지 사령관을 지냈고, [[6.25 전쟁]] 당시 해군본부 항무관으로서 군수물자 및 병력 수송에 공을 세워 미국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미 대사관 해군무관을 지내고, 해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56년 해군 후방참모부장, 1959년 [[해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됐다. 1960년 해군 소장(임시계급)에 진급하였으나, 군수품 착복으로 인한 해군사관생도들의 불신임 운동으로 교장직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008130023920301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0-08-13&officeId=00023&pageNo=3&printNo=11967&publishType=00020|그만두었다.]] 1961년 군수품 착복 건은 기소유예로 풀려났고, 동년 해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76년 2월 11일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 여담 == [[이종찬(1936)|이종찬]] 초대 [[국정원장]]이 [[육군사관학교]]지원을 할 때 [[김관오]] 장군과 함께 추천서를 작성해주었다. 당시 추천서를 본 생도대장 [[이용(1923)|이용]]이 "소위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란 건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 사실을 들은 민영구 제독은 당시 교장이던 [[이종찬]][*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동명이인이다.]장군에게 항의하였다. 다만 항의하기 전에 이미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 가족관계 == 아버지 민제호를 포함하여 가족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아버지 민제호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고, 숙부 [[민필호]]는 임시정부 외무차장, 주화대표단 부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며 건국 후에는 [[중화민국]]초대 총영사를 지냈다. 동생 민영완은 1927년 상해 청소년 비밀결사인 화랑사를 조직했고, 중국 중앙항공학교 졸업 후 중국 공군에 복무하면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사촌이자 숙부 민필호의 아들인 [[민영수(1921)|민영수]]는 [[대만 군관학교|중국중앙군관학교]] 18기를 졸업하고 광복군에 복무하며 OSS훈련에 참여하였고, 해방 후에는 외교관으로서 주 [[중화민국]] 공사를 역임하였다. 민영수의 동생 [[민영주]]도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하였고, [[김준엽]] 전 [[고려대학교]] 총장의 부인이다. == 참고자료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1980|독립유공자 공훈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188|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분류:여흥 민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