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泳殷 [[1870년]]([[고종(대한제국)|고종]] 7) [[8월 3일]] ~ [[1944년]] [[1월 20일]][* 음력 1943년 12월 25일.]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 때의 충청북도 지역 유지이자 갑부. 그리고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驪興)[* 감찰공파 28세 영(泳) 항렬.], 자는 백경(伯敬), 호는 금오(錦吾)이다. 청주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갑부이며 경제적인 이익을 얻게 되어서 기업가로도 활동했다. == 생애 == 1870년 8월 3일 [[충청도]] 청주목 북강내일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내수리[* 인근의 신안리·원통리·입동리·입상리와 함께 [[여흥 민씨]] 집성촌이다.]에서 아버지 민영호(閔英鎬)와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연일 정씨]]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http://db.history.go.kr/id/im_105_10054|#]] 이후 외동딸 하나 있는 큰아버지 민충호(閔忠鎬)와 [[한산 이씨]] 부부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896년 2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음서]]로 1902년 3월부터 1908년 10월까지 [[충청북도]] [[괴산군]]·[[괴산군|연풍군]]·[[보은군]]·[[음성군]]·[[괴산군|청안군]]·[[진천군]]·[[충주시|충주군]]·[[청주시|청주군]] 등지의 군수 또는 군수서리와 충청북도관찰사 서리 등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1911년 3월부터 청주금융조합 조합장을 역임하고, 같은 해 7월부터 충청북도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5월 충청북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19년 4월 [[3.1 운동]]의 확산을 막고자 청주자제회(淸州自制會)를 발기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1920년 12월 민선 충청북도 도평의회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4월 충청북도 도평의회원에 관선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1927년 4월 충청북도 도평의회원에 다시 뽑혔다. 1930년 4월 충청북도농회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1933년 1월 충청북도 도회의원 보궐선거와 같은 해 5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관선으로 당선된 후 충청북도회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충청북도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조선금융조합연합회 참여(參與)·시중회 평의원 등을 지냈다. 1937년 5월 관선 충청북도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 충청북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을 맡았으며, 8월에는 애국기(愛國機) '충북호' 건조를 위해 1만 원을 헌납하였다. 1938년 4월 매일신보사 감사에 취임하였다.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 각종 전쟁협력단체 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렇듯 해방 2년 전인 1944년 죽을 때까지 친일행세를 하다가 사망했다. == 여담 ==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조선공로자명감》에 [[다이쇼 덴노]] 즉위식에 친일파 자격으로 천황 즉위식에 참여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당시 다이쇼 덴노 앞에서 '천황폐하의 즉위를 축하드리며 만수무강하시고 옥체 보존하시어 장수하소서'라든가 '천황폐하의 황은(皇恩)과 성은에 감복하여 일개 미천한 놈이 천황폐하를 뵙게 되어서 감읍하였나이다'라고 망언을 퍼붓는 등 '일제를 찬양하는 매국노'였음을 인증하였다. 2013년 민영은의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땅을 돌려달라며 [[청주시]]에 소송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소송에서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310655|승소했다]]. [[분류:청원구 출신 인물]][[분류:여흥 민씨]][[분류:1870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사범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