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박무조}}}'''[br]'''朴武祚'''}}}}}} || || '''이명''' ||박능일(朴能一) || || '''자 / 호''' ||성언(聖彦) / 무호(无號) || || '''본관''' ||[[박(성씨)|월성 박씨]](月城)[* 유촌공파(柳村公派) 59세 조(祚) 항렬.] || ||<|2> '''출생''' ||[[1859년]] [[2월 29일]] || ||[[경상도]] [[군위군|의흥현]] 내화면 상라동[br](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 상라마을)[* 인근의 미성리와 함께 [[박(성씨)|월성 박씨]] 집성촌이다. [[박배근]] 전 대구직할시장, [[박영언]] 전 군위군수와 독립유공자 [[박승조]]·[[박필조]]·[[조성우(독립운동가)|조성우]]도 이 마을 출신이다.] || ||<|2> '''사망''' ||[[1917년]] [[7월 20일]] || ||[[대구광역시]] [[영일군]] [[흥해읍|흥해면]] 우목동 앞바다[br](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흥해읍]] 우목리) || || '''묘소''' ||[[대구광역시]] [[군위군]] [[의흥면]] 이지리 가지골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與其事讎而生, 不若蹈海. 朝鮮逸民 朴能一. >(원수를 섬기고 사는 것은 바다에 뛰어들어 죽는 것만 못하다. 조선일민 박능일.) 1859년 2월 29일 경상도 의흥현 내화면 상라동(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 상라마을)에서 아버지 박현원(朴顯源, 1835. 8. 16 ~ 1904. 2. 1)과 어머니 [[전주 이씨]](1828. 10. 11 ~ 1897. 12. 28)[*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이원동(李元東)의 딸이다.]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일제]]에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한을 품고 살아오다가, 1912년 제령(制令)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141817&categoryId=33384|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의 공포로 호적 편제가 강제되었으나 호적 취득을 거부했다. 그 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가족들을 이끌고 [[안동시|안동군]] [[예안군|예안면]], [[영주시|영주군]] [[풍기읍|풍기면]] 등지를 전전하다가 1917년 7월 20일 [[영일군]] [[흥해읍|흥해면]] 우목동(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흥해읍]] 우목리)의 어느 바닷가 암벽 위에서 "與其事讎而生, 不若蹈海. 朝鮮逸民 朴能一"이라고 유서를 남긴 뒤 바닷속에 투신해 순사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고향인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에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분류:군위군 출신 인물]][[분류:월성 박씨]][[분류:1859년 출생]][[분류:191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