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박수환}}}'''[br]'''朴壽煥'''}}}}}} || || '''이명''' ||박수환(朴秀煥) || ||<|2> '''출생''' ||[[1886년]] [[3월 7일]] ||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면 원황리[br](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 || || '''사망''' ||[[1950년]] [[1월 4일]]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수환(朴壽煥)은 1886년 3월 7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북면(현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에서 [[정규하]]·신상문(申相文)·[[강삼인]] 등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영해면 기독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은 [[경성부]]에서 [[3.1 운동]]의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서 영덕에 돌아와서는 이 사실을 군내 기독교계 주요 인사들에게 알리면서 영해면의 만세운동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 때 병곡면의 교회 장로 [[정규하]]는 구 영덕현 지역보다는 구 영해도호부 지역이 거사 장소로 좋다고 하여 3월 18일 영해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18일 정오 무렵에는 [[정규하]]의 선창으로 준비해 온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때 박수환은 3천여 명의 영해면·병곡면·축산면·창수면에서 온 시위군중을 이끌면서 영해 경찰관주재소를 에워싸고 일본 경찰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이 때 일본인 경찰부장이 시위대의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박수환 등은 일본인 경찰부장을 비롯한 일본 경찰 3명을 응징하는 한편, 주재소의 기구들을 파괴한 뒤 면사무소와 우편소 등 일제기관을 점령하면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드높였다. 박수환 등은 이를 저지하려는 영덕경찰서의 일본인 서장을 비롯하여 일본 경찰 5명을 여관에 감금시킨 채 만세시위를 강행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다음날인 3월 19일에도 이어졌다. 3월 19일 아침에 시위규모는 더욱 늘어나 영해면을 진동시켰다. 이에 [[포항시|영일군]]에서 일본 헌병이 출동하였으나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손을 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대구광역시|대구]]의 일본군 보병 80연대의 병력이 출동하면서 총격을 가함으로써 시위군중은 현장에서 8명의 순국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이 때 그는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30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522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방해]]·상해·건조물손괴·기물손괴·공문서훼기 및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60&evntId=0034987888&evntdowngbn=Y&indpnId=000001916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공소하였으나, 그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그대로 유지되어[[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82&evntId=0034984591&evntdowngbn=Y&indpnId=000001609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0년 1월 4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1886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