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박승유}}}'''[br]'''朴勝裕'''}}}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박승유.webp|width=100%]]}}} || ||<|2> '''출생''' ||[[1924년]] [[8월 20일]] || ||[[경기도]] [[인천광역시|인천부]] [[제물포]][br](現 [[인천광역시]] [[중구(인천)|중구]]) || ||<|2> '''사망''' ||[[1990년]] [[11월 2일]] (향년 66세) || ||[[강원도]] [[춘천시]] [[후평2동]] 현대2차아파트 자택 || || '''본관''' ||[[반남 박씨]][* 24세 승(勝) 항렬.] || || '''가족''' ||조부 '''[[박제순]]'''[br]아버지 [[박부양]]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36호 || || '''서훈''' ||대통령표창 수여[br][[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박제순|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 >박승유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성악가]]. 그리고 '''[[을사오적]] 중 하나인 [[박제순]]의 손자이자 [[박부양]]의 아들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저 두 명이 박승유 본인에게는 크나 큰 굴욕이었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潘南).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24년 8월 20일 경기도 인천부 제물포(現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조선귀족]] [[자작(작위)|자작]]이던 아버지 [[박부양]]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사직동(종로구)|사직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종로구)|사직동]]) 141-3번지로 이주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605|본적을 두었다]]. [[1944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 제국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중화민국]] [[절강성]] [[이우시|의오현]](義烏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이우시]].]에 주둔 중이던 요코이(橫井)부대에 배속되었으나, 그해 10월 부대를 [[탈영]]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뒤 10월 29일 제2지대 강남분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강소성]] [[남경시]](南京市)[* 現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난징시]].]·[[우시시|무석현]](無錫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우시시]].], [[안휘성]] [[우후시|무호현]](蕪湖縣)[* 現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우후시]].] 지역에서 광복군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했고, 평소 음악에 소질이 있어 야전 방송대에 파견되어 조선인 동포로서 징집된 일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광복군 입대를 권고하고 염전(厭戰) 가곡을 방송하는 한편, 광복군의 사기를 고취하는 등 여러 선전활동 및 심리전에서 활약해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절 박승유는 "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라고 자책하면서 가명으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 조선오페라협회 간사로 일하면서 [[성악가]]로 활동했고, [[6.25 전쟁]] 당시에는 자원입대해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정훈부 합창단원으로서 전국의 야전 부대를 순회하며 위문공연을 했다. 1953년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원광대학교]] [[교육학과]] 강사, 휘경여자중학교·[[휘경여자고등학교]] 교사 등으로 근무했고, 이 사이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https://www.insight.co.kr/news/161735|수여받기도 했다]]. [[1970년]] [[UCLA]]에 유학을 간 뒤 1975년 [[강원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에 부임해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1989년 [[정년퇴임]]했다. 1990년 11월 2일 강원도 춘천시 후평2동 현대2차아파트 자택에서 [[위암]]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0110300209218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0-11-03&officeId=00020&pageNo=18&printNo=21288&publishType=00020|별세했다]]. 향년 66세.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는 1990년 11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999년 8월 13일 [[연합뉴스]]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4458449?sid=100|<8.15특별기획> 을사오적 박제순손자 광복군 활동]], 1999년 8월 27일 [[경향신문]]의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9082700329102015&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9-08-27&officeId=00032&pageNo=2&printNo=16837&publishType=00010|여적 - 조상의 죄]]라는 기사를 통해 박승유가 늦게나마 재조명된 바 있다. 조상의 과오에 대한 죄책감으로 은둔하며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사실을 숨기고 살았기에 [[을사오적]] [[박제순]]의 후손인 면이 더욱 부각되어 알려진건 안타까운 부분. 이로 인하여 박승유 지사의 생전 사진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하기 링크에서 1975년 3월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진을 통해 지사의 생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https://bestan.tistory.com/1263|천방지축 조선귀족, 청년자작 박부양]]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성악가]][[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대한민국의 예체능 교수]][[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반남 박씨]][[분류:인천 중구 원도심 출신 인물]][[분류:1924년 출생]][[분류:1990년 사망]][[분류:위암으로 죽은 인물]][[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법학전문대학원]][[분류:강원대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