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밀양 박씨]][[분류:의성군 출신 인물]][[분류:1869년 출생]][[분류:190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 성명 ||박연백(朴淵伯) || || 이명 ||박연백(朴淵白) || || 자 / 호 ||응구(應九) / 암재(巖齋) || || [[본관]] ||[[밀양 박씨]] || || 생몰 ||[[1869년]] [[8월 1일]] ~ [[1909년]] [[2월 20일]] || || [[출생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장호(1886)|박장호]]도 이 마을 출신이다.][[http://uise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uiseong&dataType=99&contents_id=GC05201016|#]] || || 사망지 ||[[경상북도]] [[경주시]] || ||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연백은 1869년 8월 1일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에서 박광호(朴光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뒤 격문을 작성하고 사방으로 보내 사람들을 모아 공산에서 거병했다. 1906년 7월 죽창과 나무막대기 등 낙후한 무기로 무장하고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며, 의성·의흥·영천·청송 등지로 전전하면서 야간기습과 화공을 단행하여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1907년 10월 영천의병장 정관여(鄭寬汝)와 합세하여 경주 죽지면 입암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정관녀가 전사하고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지만 그 과정에서 손실이 컸다.그 해 11월 25일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의성군사무소, 일경 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청송군 소정리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또한 25일에 의성군에서 일본 수비대와 접전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더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의병을 해산하고 경주로 가서 1909년 2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연백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8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