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사)] ---- [목차] [clearfix] 朴寅亮 (? ~ 1096년) == 개요 == 고려의 문신. 자는 대천(代天)이고 시호는 문열공(文烈公)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유명해 당대에 [[북송]]이나 [[요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는 반드시 박인량을 거쳐서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 생애 == 죽주(竹州)[* 현재 경기도 안성] 또는 평주(平州)[* 현재 황해도 평산군] 출신으로, 오늘날의 죽산 박씨(竹山 朴氏) 또는 평산 박씨(平山 朴氏)가 된다. [[이자연(고려)|이자연]]의 문생으로 [[문종(고려)|문종]] 5년인 1051년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한다. 문종 30년인 1076년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임명되는데 곧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관직을 옮긴다. 문종 33년인 1079년 송나라에서 의원을 보내 문종을 치료해 준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이듬해 1080년 호부상서(戶部尙書) [[유홍(고려)|류홍]]과 함께 송나라에 간다. 그런데 가는 도중 [[저장성|절강]]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고, 배에 싣고 가던 조공품은 대부분이 바다에 가라앉는다. 결국 빈손으로 도착한 꼴이 된 박인량 일행은 류홍이 [[신종(송)|신종]] 앞에서 스스로를 탄핵한 끝에 책임을 불문에 붙이겠다는 칙서를 받음으로 없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한편 이 때 박인량과 일행 [[김근(고려)|김근]](金覲)이 지은 편지, 문서, 시 등이 송나라에 전해져 찬사를 들었으며, 이는 『소화집(小華集)』이라는 책으로 간행된다. 문종 37년인 1083년 시강학사(侍講學士)로 있으면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로 중서시랑(中書侍郞) [[최석(고려)|최석]]과 과거를 주관했다. [[선종(고려)|선종]] 4년인 1087년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선종 6년인 1089년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된다. 상서우복야 참지정사(尙書右僕射 叅知政事)로 있다가 [[숙종(고려)|숙종]] 원년인 1096년 9월[* 《고려사》 흉례지에는 숙종 9년에 죽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에 죽었으며, 문열(文烈)의 시호를 받는다. == 문장 == * 진정표(陳情表) >普天之下, 旣莫非王土王臣, 尺地之餘, 何必曰我疆我理? >넓은 천하에 이미 왕의 땅, 왕의 신하 아닌 것 없는데, 남은 땅 수 척을 어찌 자기 영토요 자기가 다스리겠다고 하십니까? > >歸汶陽之舊田, 撫綏弊邑, 回長沙之拙袖, 抃舞昌辰. > 문양[* 문양은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땅으로 [[제나라]]가 뺏었다. 회맹 중 노나라 사람에게 협박을 당해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제환공]]은 [[관이오|관중]]의 조언으로 약속을 지켰다.]의 옛 땅을 돌려줬듯 우리나라를 어루만지고 편안케 하면, 땅이 작은 우리나라에서도[* 원문은 장사(長沙)에서 졸속(拙袖)을 돌리다. [[한경제]]와 장사정왕 유발의 고사로, 유발이 자기 봉국이 좁고 작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태평성대에 손뼉을 치며 춤출 것입니다. 문종 29년인 1075년 요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로 《고려사》 박인량 열전에 실려있다. 당시 거란은 압록강 남쪽에 성을 쌓으며 고려와 국경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이를 비판하는 글이다. * [[http://db.history.go.kr/id/muds_003r_0010_0010|입요걸파각장장(入遼乞罷榷場狀)]] 요나라에 들어가 압록강 유역의 시장인 각장(榷場)을 폐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 * [[http://db.history.go.kr/id/muds_005r_0010_0160|문왕애책(文王哀冊)]] 문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 * 금산사에서 지은 시 >巉巖怪石疊成山, 上有蓮房水四環. 깎아지른 바위와 괴이한 돌들이 포개어 산을 이루고, 산 위에는 사찰 물이 사방을 두르네 >塔影倒江蟠浪底, 磬聲搖月落雲間. 탑 그림자 강에 거꾸로 비쳐 물결 속에 일렁이고, 경쇠 치는 소리에 달 흔들려 구름 사이로 떨어지네 >門前客棹洪波急, 竹下僧棊白日閑. 문 앞 손님의 노에는 큰 파도가 급한데, 대나무 아래 바둑 두는 스님들 대낮에도 한가하구나 >一奉皇華堪惜別, 更留詩句約重還. 한 번 중국 사신을 받드니 헤어짐을 감당하기 난감해, 다시 시구를 남겨 돌아올 것을 맹세하노라 * 절강의 [[오자서]] 사당에서 지은 시 >掛眼東門憤未消, 碧江千古起波濤. 동문에 눈을 빼 걸어둔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푸른 강은 오랜 세월 파도를 일으키네 >今人不識前賢志, 但問潮頭幾尺高. 요즘 사람들은 앞 현인의 뜻을 알지 못한 채, 다만 파도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나 묻는구나 정황상 북송에 다녀온 1079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보한집]]에 따르면 박인량이 강가의 오자서 사당에서 이 시를 지어 조문하자 이승뿐 아니라 저승까지도 감동해 풍랑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 가족관계 == 아들 박경산(朴景山)의 묘지명에 따르면, 박수경의 후손이다. * 4대조: [[박수경(고려)|박수경]](朴守卿) * 증조부: 박승위(朴承位) * 조부: 박복종(朴扑琮)[* 『박경인 묘지명』] 또는 박종(朴琮)[* 『박경산 묘지명』] * 부: 박충후(朴忠厚) * '''본인: 박인량''' 박인량은 슬하에 아들만 여덟을 뒀다.[* 『박경인 묘지명』] 《고려사》에는 세 아들의 이름만 남아있다. * '''본인: 박인량''' * 아들: [[박경인]] * 아들: 총서(聰諝) - 차남으로 출가해 홍원사(洪圓寺)의 7대 주지를 거처 광제승통(廣濟僧統)에 이르렀다. 자(字)는 범진(梵眞), [[법명]]은 총서(聰諝)이고 법호는 광제(廣濟)이다.[* 『홍원사 광제승통 총서 묘지명 (洪圓寺 廣濟僧統 聰諝 墓誌銘)』] * 아들: 박경백(朴景伯) - [[선종(고려)|선종]] 3년인 1086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벼슬은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 아들: [[박경산]] [[분류:고려의 인물]][[분류:고려의 시인]][[분류:죽산 박씨]][[분류:평산 박씨]][[분류:109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