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김해시의 독립운동가)] [include(틀:제3대 국회의원/경상남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2 박재홍}}}'''[br]'''朴在洪'''}}}}}}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eople.phinf.naver.net/yonhapnews_33608269.jpg|width=100%]]}}} || ||<|2> '''출생''' ||[[1903년]] [[1월 18일]] || ||[[경상남도]] [[김해군]] 활천면 남역리[br](현 경상남도 [[김해시]] [[삼정동(김해)|삼정동]])[* [[http://db.history.go.kr/id/im_106_00829|#]]] || ||<|2> '''사망''' ||[[1979년]] [[6월 28일]] (향년 76세)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의료원]] || || '''묘소'''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오산리 크리스찬메모리얼파크 || || '''종교''' ||[[불교]]^^([[정토종]])^^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정치인]]. 대단히 복합적인 삶을 산 인물로, 일제 협력 행각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피의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으나 박열을 후원하거나 일제의 징용론에 반대하여 징역살이를 하는 등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박재홍은 1903년 1월 18일 [[경상남도]] [[김해군]] 활천면 남역리(현 [[김해시]] [[삼정동(김해)|삼정동]])에서 박윤실(朴允實)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김해군 좌부면 북내동(현 [[김해시]] [[서상동(김해)|서상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으며, ■순남(■順南)과 혼인하여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 장남 박정웅(朴正雄, 1926년생), 차남 박근(朴勤, 1928년생), 3남 박실(朴實, 1930년생), 4남 박방웅(朴芳雄, 1934년생).] 광복 후 [[국민대학교]] 상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타이세이(大成)중학교와 [[나가사키대학|나가사키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고[[http://db.history.go.kr/id/im_106_20442|#]], 인삼행상을 하면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하였다.[[http://db.history.go.kr/id/im_106_00829|#]] 그러던 중 [[아나키스트]] [[박열]]에게 감화되어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재정 자금을 후원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1926년 1월 22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오사카형무소에서 미결 기간까지 총 3년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에서 [[닛카쓰]]키네마 각 본부에 근무하다가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 [[부산]] [[조선방직]] 인사과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대구광역시|대구부]]에서 영화관 대경관(大鏡館)을 설립하여 경영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이타현]] [[벳푸시]]에 일선(日鮮)무역상회를 설립하고 경영하는 한편, 벳푸시 남부여관 조합장을 역임했다. 1931년 [[만주사변]] 때 [[창춘시]] 거류민교포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1932년에는 [[제주도]]에 파견된 [[관동군]]에 종군하여 1등 통역관으로서 [[펑톈성]]·[[러허성]]·[[지린성]]·[[헤이룽장성]] 등 각 성을 전전했다.[[http://db.history.go.kr/id/im_106_00829|#]][* 이 부분은 [[만주국]] 설립과 관동군에 일조하였으므로 친일행적이라 보아도 맞다는 시각이 있다.] 이후 귀향하여 김해운수주식회사(金海運輸株式會社)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3년경 일제가 김해운수주식회사를 탈취하려 하자 그의 부당성에 항거하여 법정투쟁을 전개했으나 오히려 체포된 뒤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4년 8월 김해읍 부원리(현 [[김해시]] [[부원동(김해)|부원동]])에 김해주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였고[[http://db.history.go.kr/id/hs_001_1935_04_08_1100|#]], 일선공애회(日鮮共愛會) 회장, 대일본신농회(大日本神農會) 간사장, 포크라니케나재류민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http://db.history.go.kr/id/im_106_00829|#]] 그 후 1943년경 김해군에서 개최된 노무동원(勞務動員) 시국좌담회 회의장에서 한국인에 대한 강제징용안이 거론되자, 이에 분노한 그는 한국인의 강제 징용에 앞서 일본인이 먼저 징용에 솔선수범할 것을 주장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1944년 11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국가동원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8.15 광복]] 후 [[일본]]으로 잠시 건너가 [[일본사회당]] 간부를 지내기도 했으나[[http://db.history.go.kr/id/im_106_20442|#]], 귀국하고는 [[우익]] 정치인이 되어 [[대동청년단]]에 입단, 경상남도 조직부장을 역임하다가 탈단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후보를 사퇴하였다. 이후 대동신문사 경남지사장, [[대한청년단]] 경남후원회 조직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9년 2월 10일 애화회와 일선공애회 등으로, [[반민특위]]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피의자 명단|피의자 명단]]에도 오르기도 했다. > 道民(도민)의 視線(시선)이 集中(집중)한 가운데 活動(활동)을 開始(개시)한 反民特委(반민특위) 慶南(경남) 調査(조사)부에서는 그동안 各(각) 方面(방면)으로 銳意(예의)한 調査(조사)를 하야 오던 바 드디어 第一號(제일호) 令狀(영장)이 지난 七日(칠일) 發表(발표)되였는데 指名(지명)된 者(자)는 府內(부내) 光復洞(광복동) 二街(이가) 一二番地(일이번지) 高利貸金業者(고리대금업자)인 朴在洪(박재홍)(四七(47세))인데 同日(동일) 下午(하오) 十一時(십일시) 自宅(자택)에서 무難(난)히 逮捕(체포)하여 第十六區(제십육구) □□□ 留置場(유치장)에서 收監(수감)하얏는데 朴(박)은 日本(일본) 山口高商(야마구치고상)을 卒業(졸업) 中日戰爭時(중일전쟁시)는 倭軍(왜군)의 北支(북중국) 派遣(파견) 一等(일등) □□으로 活動(활동)하였고 그 當時(당시) □會長(회장)으로서 倭國警察(왜국경찰)의 忠實(충실)한 “압재비”였다고 하며 아즉도 日本人(일본인) 妻(처)를 다리고 있는 者(자)라 한다. [[https://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490210000012|#]] 그 해 [[대한국민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취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국민당]] [[최원호(정치인)|최원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표차 60표에 득표율 0.18% 차이로 석패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최원호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제3대 국회의원]] 재직 중에 국회제출 건의서에 사용하겠다는 명목으로 동료 의원들의 날인을 받아 사적인 목적에 이용했다가 발각되어 1개월간 출석정지를 당하는 징계 처분을 받기도 했고, 대한국민당을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하는 등 물의를 빚기도 했다.[[http://db.history.go.kr/id/im_106_00829|#]] 이후 호헌동지회에 속하였다가 다시 무소속으로 속하였다.[* 이즈음 [[부산광역시]] [[중구(부산)|중구]] [[광복동2가]]로 이주하여 살기도 했다.[[http://db.history.go.kr/id/im_106_20442|#]]]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강종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한편 해양소년단 본부장, 대한민국민간외교협회 중앙위원, 실업동지회 경상남도 지부장, 세계연맹정치경제연구회 한국지부 [[이사(직위)|이사]] 등을 역임하다가, 1961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102400209103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1-10-24&officeId=00020&pageNo=3&printNo=12254&publishType=00010|사기 혐의로 기소되었다]]. 1967년 [[민중당(1967년)|민중당]]에 입당하여 중앙상임위원 및 김해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그해 6월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1967년)|민중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후보를 사퇴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2가]], [[중구(서울)|중구]] [[중림동]]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63000239107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9-06-30&officeId=00023&pageNo=7&printNo=17914&publishType=00010|#]] 1979년 6월 28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063000239107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9-06-30&officeId=00023&pageNo=7&printNo=17914&publishType=00010|#]]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재홍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갑) || [include(틀:무소속)] ||<-3> 후보 사퇴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갑) || [include(틀:대한국민당(1949년))] || 7,525표 (22.34%) || 낙선 (2위) ||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갑) || [include(틀:민주국민당)] || '''12,044표 (32.93%)''' || '''당선 (1위)''' || '''초선''' ||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갑) || [include(틀:무소속)] || 2,336표 (6.04%) || 낙선 (3위) ||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 [include(틀:민중당(1967년))] ||<-3> 후보 사퇴 ||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박재홍, version=262)]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제3대 국회의원]][[분류:대한국민당 국회의원]][[분류:무소속 국회의원]][[분류:김해시 출신 인물]][[분류:1903년 출생]][[분류:197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민대학교 출신]]